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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 행진곡
형. 왜 임마. 형수님이랑 신혼일 때 많이 싸웠어? 갑자기 뭔 소리야 미친놈이. 한 형사가 물고 있던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여간 미혼인 주제에 뜬금없이 이런 주제를 잘도 꺼내는 후배였다. 그러나 류선재는 진지했는지 꿋꿋이 다시 되물었다. 어땠냐고 그때. 원래 몇십 년을 살을 부대낀 가족끼리도 잘 싸우는데 하물며 처음 한 지붕에 들어간 사람들이 처음부터 퍼즐 조각같이 딱딱 들어맞겠냐?
“갑자기 그건 왜 묻는데? 왜, 김백경 씨랑 싸웠냐?”
“아니…. 싸우진 않았고.”
“일단 전적으로 네 잘못일 테니까 숙이고 들어가라.”
사정을 모르는 옆 팀 팀원이 홍삼을 쫍쫍 빨다가 둘을 흘깃 봤지만 류선재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33살 동갑인 류선재와 김백경은 현재 동거하고 있다. 그들은 10년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그동안 우정을 유지했다는 뜻은 아니고 류선재가 말하길 그 당시에 귀여운 동갑답게 티격태격하며 지냈고 재회 후 동거까지 하게 되었지만 사실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류선재는 과거를 되돌리는 능력이 있다면 당장 돌아가서 며칠 전 류선재의 멱살을 잡고 업어치기 할 것이다.
그들이 재회한 곳은 이곳, 경찰서였다. 하필이면 경찰과 용의자의 신분으로 만났다.
사건의 전말을 이랬다. 메신저 어플로 만난 애인을 등쳐먹고 도주한 사건에서 범인의 이름, 보낸 사진, 거기 찍힌 그의 물건들을 하여금 특정하자 김백경이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류선재는 원래 제비같은 놈들을 질색했고 감정적인 사람이나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10년 만에 만난 친구, 아니… 첫사랑을 이딴 곳에서 재회할 줄은 몰랐기에 꽤나 감정적이게 됐다. 한 형사가 거울을 보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그렇게 무너진 표정을 짓고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김백경, 당시 김강휘는 갑자기 흔적도 없이 그를 떠났다. 그날은 류선재가 고백하기 위해 약속을 잡았던 날이었다. 그가 아르바이트하던 국밥집에서 들은 말로는 같은 알바생이 고백하자 김강휘는 이름도 기억 못했다며 모질게 거절했고 그 알바생이 홧김에 이딴 식으로 여자들 간 보고 확인용 고백에 매몰차게 거절했다면서 저번 주부터 안 오던 단골손님도 그래서 발길을 끊었다면서 길길이 날뛰었다고 했다.
류선재는 김강휘의 성격을 알기에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김강휘는 여느 제비처럼 이성의 관심을 즐기기는커녕 부담스러워했고, 동성에 동갑인 류선재와 둘이서만 지내는 게 제일 편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김강휘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친구가 된 것이 기뻤다. 동시에 자신을 향한 호감에서 일말의 희망도 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강휘는 그렇게 소중한 사람인 것처럼 대했으면서 일언반구없이 떠난 것도 모자라 전화번호까지 바꿨다. 뒤늦게 든 생각은 류선재는 김강휘가 사는 집, 가족, 어릴 때 이야기 등 개인적인 이야기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류선재가 먼저 알려주면 김강휘도 알려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큰 오산이었던 게 김강휘는 자기 일을 말해야 될 타이밍에 질문으로 답하는 사람이었다. 친구라고도 하기 어려운데 썸탔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 이런 생각은 가지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면 그 알바생의 말이 맞고 김강휘는 류선재도 확인용 고백을 하려는 걸 눈치채고 잠적해버린 거 아닐까?
또다시 여자 문제로 얽히니 별의 별 게 다 생각이 난다. 류선재와 김강휘는 나이, 키, 체격, 좋아하는 음식, 취향, 취미, 가치관 등이 복제 인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 맞았다. 어쩌면 자기 자신을 김강휘한테 투영해서 더 화가 솟구치는지도 모르겠다.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무죄추정의 원칙을 개무시한 것처럼 김백경을 범인으로 대하듯 취조 중이었고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내뱉은 뒤였다.
“김백경 씨 개명하셨네요?”
“그건….”
“왜, 여자들 등쳐먹기 편하라고?”
뒤늦게 안 사실로는 김백경이 전에 일하던 아르바이트에서 동명이인이 있다길래 호칭이 겹치는 것이 싫어 바꾼 것이었고 굳이 “백경”인 이유는… 류선재랑 보러 갔던 연극 <백경>에서 따왔던 것이었다. 류선재 바보 멍청이 똥개 머저리야…. 김강휘는 연극을 감명 깊게 본 여운으로 백경이라는 제목 멋지다고 중얼거렸고, 잘 보이고 싶었던 마음에 만약에 개명할 일 생기면 류백경이라고 개명하겠다고 말한 사람이 나였는데 그걸 까먹고 김강휘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그때 남발한 망언을 다시 떠올리는 바람에 류선재는 반사적으로 자기 입을 때렸고 지켜보던 한 형사는 고개를 저었다. 늦었어, 인마.
“그래도 운이 좋았어. 사칭에 도주까지 시도했는데 취조 중에 진범이 잡혔잖아? 하마터면 김백경 씨 감옥살이할 뻔했어.”
“아니까, 그만. 상상만 해도 괴로우니까.”
“미친놈.”
그래도 뭐, 미안하다고 손발이 닳도록 싹싹 빌었다며. 그놈이 잡히고 방까지 잃어서 갈 곳 없는 김백경 씨 데리고 갔고. 난 솔직히 룸메가 나를 사칭하고 사기 치다가 잡혔다? 믿을 인간 하나 없다고 저주하면 혼자 살았지 남이랑 살 생각은 못 했을 텐데 김백경 씨도 대단해. 비꼬는 말이 아니라 한 형사는 진심으로 김백경이 신기했다. 그것도 하마터면 자기를 감옥에 넣을 뻔한 류선재랑 살다니? 한 형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할 일이다. 김백경 씨가 네 얼굴 볼 때마다 욕지거리를 안 하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그건 맨날 주님한테 감사하다고 하고 있어. 그보다 형, 나 고민 있어. 다시 진지해진 류선재 표정을 보는 둥 마는 둥 한 형사는 귓등을 긁적였다. 어, 그러냐? 말하지 마. 바빠. 아 좀 들어줘잉! 으악 시발 뭐야?
“뭔데 10초 내로 말해.”
“백경이 걔 내 기억이랑 너무 달라.”
그래. 한 형사는 그게 뭐 대단한 말이라고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으럼 10년 동안 취향이 하나도 안 바뀌면 뱀파이어지 사람이겠느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빈정거리는 말에도 류선재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한 형사는 체념한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 말해 보든가….
업보를 청산할 기회를 얻은 류선재가 선택한 방법은 백경을 기억하지 못했던 건 실수라고, 나는 사실 10년 전 너를 잘 기억하고 있다고 너한테 관심이 많았다고 어필을 하는 거였다.
“여기 감자조림이랑 감자채볶음도 먹어봐.”
“맛있지? 예전에도 감자 좋아했잖아.”
그러나 정작 김백경은 류선재가 놓아뒀던 높이가 같은 젓가락을 들고 몇 번 감자를 찌르며 깨작거렸다. …입맛에 안 맞아? 아니, 맛있어. 그냥 아침밥 못 먹어 버릇해서. 결국엔 밥알 한 톨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싹싹 비우긴 했지만 순수한 김백경의 장미처럼 어여쁜 마음씨를 고려하면 남이 정성스레 만든 밥을 모질게 엎고 나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꾸역꾸역 먹었을지도 몰랐다. 류선재의 생각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10년 전에도 김백경과 만날 때 아침을 먹는다는 말을 못 들었는데 류선재는 아침을 챙겨 먹으니까 당연히 김백경도 먹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 잠깐만 반성.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치자.
“이거 마셔. 녹차라떼 좋아하지?”
“네가 좋아했지.”
“레슬링 보러 갈래? 예전에 같이 보는 거 좋아했잖아. 그치?”
“좀 피곤하네.”
“피아노 좋아하지? 내가 쳐줄까?”
“그닥.”
꿋꿋하게 어필했으나 김백경은 부정했다. 심지어 귀찮은 듯한 태도였기에 류선재는 더욱 시무룩해졌다. 이건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김백경의 취향이었다. 그는 같은 피를 나눈 동생이랑도 좋아하는 게 안 겹쳤는데 김백경과는 쌍쌍바를 반 갈라놓은 듯도 맞아 제대로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류선재와 김백경은 키도 같았고, 체격도 비슷했으며 신발도 실수로 바꿔 신은 적 있는데 발 치수까지 딱 맞아 깜짝 놀랐었다. 그때는 그게 운명 같았고 그래서 김백경이랑 더 친해지고 싶었다.
비록 고백도 못 하고 헤어졌지만. 게다가 누명에 쓰인 김백경을 믿어주지는 못할망정 모함하고 감옥에 넣을 뻔했다. 솔직히 김백경이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같이 살아보니 안 맞고 더 짜증 난다고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하고 나가도 할 말이 없었다.
허어엉… 안 돼 김백경… 가지 마… 류선재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자 한규언이 안쓰럽다는 듯 쳐다봤다. 안 그래도 윗선에 보고드릴 것도 있고 일도 쌓여서 바쁜데 한규언 정에 약해서 어떡하냐. 한숨 쉬고는 책상을 톡톡 치며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말이지. 답은 간단해.
“그냥 뭐 좋아하냐고 물어봐.”
“좋아한다고?”
“어우씨 징그럽게 앞뒤 잘라먹지 말고! 김백경 씨 취향이나 취미 이런 거 다시 제대로 물어보라고.”
동갑의 좋은 점이 뭐냐. 세상이 워낙 빨라서 2살 터울이 돼도 세대 차이 느끼는 세상인데 비슷한 시간, 비슷한 시각을 갖고 살아서 생긴 유대감이나 뭐 그런 거 있잖아. 기대기 어려운 어린 동생이나 공감보다는 해결책 위주로 꺼낼 거 같은 형, 누나보다는 잘 털어놓을 수 있지 않나? 이따 퇴근하고 밥이라도 한 끼 하면서, 아니 술이라도 한잔 기울이면서 속 터놓고 이야기해 봐.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너는 뭘 좋아하냐. 나는 너랑 고민도 들어주고 의지도 하고 싶고 둘도 없는 베프가 되고 싶다! …듣고 있냐? 왜 대답이 없냐. 한 형사는 진지하게 류선재의 고민을 들어줬으나 정작 이번엔 류선재 쪽에서 반응이 느렸다. 기껏 성심성의껏 대답해줬더니, 발끈한 형사가 돌아보자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마주했다.
“어우씨… 뭐야?”
“고민을 들어주고 의지하고… 그런 사이가 되는 건 원했지만.”
“어… 근데 뭐.”
“그냥 친구… 둘도 없는 우정… 그런 건, 싫은데.”
“…그게 무슨 소리냐. 베프가 싫다고?”
“응.”
“별로 안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랑 안 맞아서 이 정도로 고민한다고? 류선재 네가? 아니면, 잠깐만 친구 사이는 싫다는 그런, 그렇다는 건….”
“….”
에라이. 대충 눈치챈 한 형사가 혀를 찼다. 원래 드라마로 보는 캐릭터들의 사랑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친한 친구의 사랑 이야기는 징그러운 법이다. 류선재 이 노빠꾸계의 거장이 왜 그렇게 눈치를 보는가 했더니 단순히 김백경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좋아…해서겠…지. 지랄! 얼떨결에 연애 상담을 해준 한 형사는 팔뚝에 돋은 닭살을 문지르곤 알아서 하라며 자리를 떠버렸고 류선재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니, 심장은 원래 두근거리는 게 맞고 박동이 빨라져 진정하기 힘들었다. 10년이 지났지만 역시 류선재는 김백경을 잊지 못했나? 새삼스레 자각하니 얼른 퇴근하고 싶어 미칠 거 같았다.
시계는 왜 존재하냐 당장 김강휘 만나러 못 가게 막아둘 거면. 몰래 건전지 빼버리고 퇴근 시간으로 돌려버릴까? 쓸데없는 고민하던 중 옆에 있던 강서화가 청춘이다, 청춘이야. 라고 감탄해 그제야 이걸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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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무슨 정신으로 돌아갔는지 기억이 안 난다. 시간이 되자마자 빠르게 짐을 챙겨 나왔고 운전하고 엘리베이터를 잡았는데 너무 느려서 계단으로 뛰어가는 상상도 했다. 만약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류선재는 서너 칸씩 껑충껑충 뛰어올랐을 것이다.
문을 부술 기세로 들어가자 티비를 보던 김백경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나, 왔어! 어, 어어… 그래 어서 와. 부스럭 소리 내며 움직이던 김백경이 기지개를 쭉 켠 뒤 눈을 확 뜨고 류선재를 응시했다. 순간 숨 쉬는 것을 까먹을 뻔했다. 백경이는 티비를 왜 보는 걸까? 어느 아름다운 것들을 모아도 김백경의 얼굴보다 재밌는 게 없는데. 마음을 자각한 채 김백경을 다시 보니 빨리 달려서 심장박동이 거세진 건지 저 수려한 얼굴의 별을 박아놓은 듯한 눈망울이 감사하게도 자기를 향해서인지 헷갈렸다.
이 때문에 선배의 조언대로 말한다는 것이 마음이 급해 말을 이상하게 꼬아버렸다.
“배고프지? 술 마실래?”
“빈속에 먹으면 위장 상한다면서요. 과학잡지 애독자 씨?”
조금 민망했지만, 김백경은 상황이 웃겼는지 배를 잡고 웃었고 시간 더 늦기 전에 먹자며 부엌으로 향했다. 어어, 잠깐만 네가 왜 부엌으로 가? 밥부터 먹어야지. 아니, 좋은데 그 칼 내려놔 위험하게. 내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위험할 게 있나? 김백경이 얼떨떨하게 답한 사이 류선재는 칼을 쏙 뺏어 들었고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듯 의자로 턱짓했다.
한창 저녁 준비가 이어졌다. 류선재가 밥을 푸는 동안 김백경은 옆에서 알짱거리다 반찬을 세팅했다. 부대찌개가 보글보글 끓자 라면 사리를 넣고 젓가락으로 휙휙 면발을 풀었다. 하여간 김백경도 남한테 대접을 가만히 못 받는 성정이고 뭐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류선재가 10년 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며 자신과 비슷한 성향이라 기억에 남았다. 이건 변하지 않았네.
밥을 다 먹은 후 김백경은 벌떡 일어나 냉장고에서 술을 꺼냈다. 어? 술 마시게? 응, 아까 마시고 싶다며. 나도 오랜만에 먹어보지 뭐. 류선재야 좋았다. 10년 만이네…. 같이 살게 된 이후로 한 번도 안 마셔봤는데. 내가 술을 자주 안 마셔서. 응, 나도 술이 약하기도 하고. 며칠 삐걱거리긴 했지만 이럴 때 보면 둘은 영혼의 단짝이었다.
김백경의 잔에 술을 따라주자 김백경도 곧 류선재의 잔을 채웠다. 아이고 김 사장, 하고 상황극을 하며 건배를 요청하면 김백경은 받아주진 않되 즐겁다는 듯 웃으며 잔을 부딪친다. 부대찌개를 넉넉하게 끓인 데다 오돌뼈 주먹밥까지 만들어 뒀기 때문에 다시 안주를 세팅하느라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주워 먹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알바 자리 찾고 있어. 용의자로 붙잡혀서 며칠만 빠지겠다고 하니까 바로 잘라서. 미쳤나? 신고해버려. 하하…. 너는 뭐 하고 지냈는데? 나야 뭐, 경찰이 됐지. 그래, 바보야 그래서 이렇게 만났지. 어, 어어 그렇지. 이런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며 잔을 몇 번 기울인 후에 정적이 흘렀다. 류선재는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백경아. 응?
“내가 너무 예전 생각만 했지.”
“응?”
“너한테 잘 보이고 싶었거든.”
내가 이만큼이나 너한테 관심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고 어필하고 싶었거든. 내가 전에 실수하기도 했고… 그건 다시 사과할게. 진짜, 정말로 미안해. 류선재가 식탁에 박을 기세로 머리를 숙이자 당황한 김백경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 뭐 괜찮다고 했잖아. 덕분에 나는 이렇게 너네 집에서 지내게 됐는데. 괜찮아… 달래는 어투에도 쉬이 류선재는 동그란 머리통을 올리지 않았고 그 까슬까슬한 감촉을 기억하는 손을 저도 모르게 올리려던 그때 고개가 확 들리며 류선재와 눈이 마주쳤다. 손은 어정쩡하게 허공을 맴돌다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던 건.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헤어져 있어서 모르는 게 많아.”
“그렇긴 하지.”
전적으로 그 원인은 갑자기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김백경한테 있었다. 잘잘못을 따지자는 말은 아니었는데 김백경은 주먹밥을 씹고 삼키면서도 독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반응했다. 내 말을 오해했나? 류선재는 급하게 생각을 휙휙 지우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까아, 내 말은! 못 만난 시간이 아까우니까 좀 더 가까이! 붙어먹겠다고.”
“그렇구나 좀 더. 응?”
“김백경 씨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무슨 운동할 건지 새로운 취미가 생겼는지 하나하나 수사해볼게.”
“그러다 취조도 하겠다.”
“그것도 좋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형사 아저씨 이거 권력남용이에요.”
“지금부터 김백경 씨를 집중 케어 하면서 관찰일지를 써보겠습니다.”
“허.”
“귀찮아도 참아주시길.”
나는 김강휘도 알고 싶고 김백경도 알고 싶으니까 더 알아가면 따따블로 행복해지는 거지, 안 그래? 막무가내도 이런 막무가내가 없었지만, 김백경은 하나하나 반박한 것치곤 정말로 화나지 않았는지 그저 웃더니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며 남은 주먹밥을 류선재 입에 먹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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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경 관찰일지>
20xx년 xx월 xx일
그동안 몰랐는데 김백경한테 챙겨준 젓가락이 높이만 같았지, 무늬가 조금 달랐다.
한 번도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없었는데 김백경 앞에서는 왜 이렇게 실수를 하는 거지? 다음부터는 잘 살펴야겠다.
김백경은 눈치 못 챈 걸까 아니면 무안할까 봐 그냥 먹은 걸까?
사실 궁금해서 슬쩍 찔러봤는데 그렇구나…라고 대답할 뿐 굳이 짝을 맞춰주진 않았다.
아르바이트할 때나 같이 밥 먹을 때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서 섬세한 줄 알았는데 김백경은 생각보다 둔한 거 같다.
20xx년 xx월 xx일
김백경은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할까?
먹는 종류를 다양하게 알고 싶어서 뷔페로 갔는데 각자 10접시씩 먹고 왔다. 김백경이랑 같이 먹으면 먹는 속도도 비슷하고 먹는 양도 같아서 뭘 같이 먹기 좋았다. 다음엔 전국 곳곳의 맛집 도장을 깨러 가야겠다.
아참, 제대로 적어야지. 한식, 중식, 일식, 양식 등 가리는 것도 알레르기도 없다고 했다. 아, 디저트류는 달콤한 과일이 듬뿍 들어간 생크림 케이크와 바닐라라떼를 먹는 것을 보아 단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만날 때마다 아메리카노 아니면 녹차라떼만 마셔서 김백경이 과일 생크림 케이크를 선호할 줄은 몰랐다.
이번 생일 때 챙겨줘야겠다.
게다가 오늘 맛있었다면서 김백경이 다음엔 레스토랑에 가자고 말했다. 동거 시작한 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김백경이 먼저 바라는 것도 처음 들었다.
바라던 바였다. 왜냐하면….
보통 연인들은 레스토랑에서 데이트하니까?
오케이 김칫국 적당히 마시겠다.
20xx년 xx월 xx일
운동은 직접 몸으로 겨루는 레슬링이나 복싱보다 배드민턴을 좋아한다.
오피스텔 상가에 있는 체육관에 갔을 때 백경이는 당구장이 있냐고 물었고 없다고 답하자 그다음으로 배드민턴에 제일 흥미를 보였다.
다음에는 당구장도 같이 가봐야겠다.
나는 배드민턴을 대학교 교양 이후로 처음 해 보는데 나쁘지 않았다.
내기까지 걸고 승부를 겨뤘다. 운동을 못 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백경이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점수 차를 벌렸다. 셔틀콕으로 온몸을 콕콕 두들겨 맞고 나서야 든 생각인데 이거 노린 거 아니지?
물론 레슬링과 복싱을 했던 내가 셔틀콕에 맞아 아픈 건 아니고 삑삑 화내면서 맞아라! 하고 콕콕 셔틀콕으로 때리는 김백경을 상상하면 귀여웠기 때문에 크게 신경 안 쓴다.
정말로! 신경 안 쓴다! 학생 때 체육 시간에 처음 배웠다고 했나? 국가대표셨나 보다! 절대로 승부욕이 불탄 게 아니다!
보기 좋게 패배하고 김백경이 소원을 빌었는데 내일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내가 이겼나? 오히려 좋았다. 집으로 오면서 무슨 영화 볼지 의논했고 바로 예매했다.
히히 설렌다.
20xx년 xx월 xx일
영화를 보러 왔지만(영화는 막장 코미디물이다. 전에는 범죄스릴러 잘 보더니 이것도 취향이 바뀌었나 보다) 시간을 잘못 본 탓에(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다. 같이 상의했는데 어떻게 둘 다 잘못 봤을 수가?) 옆 극장에서 곧 열리는 연극을 보러 왔다. 하필이면 백경이었다. 김백경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평소에는 쓰지도 않던 삼인칭을 쓰며 들어가니까 귀여웠다. 아니! 양심이 너무 아팠다.
“백경이는 백경이 보고 싶은데.”
20xx년 xx월 xx일
선재야 오늘 거도 써야지?
자기 전에 쓰려고 놔뒀는데 백경이가 이렇게 귀여운 글자를 적어놨다니! 김백경은 글씨도 귀엽다! 이 부분은 찢어서 코팅해야겠다.
그리고 백경아 위에 선 그어놔도 소용없다. 이미 내 머릿속에 무한 저장해놓고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듣고 있거든. 약 오르지?
요즘의 내 최대 관심사는 김백경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알아가는 게 얼마나 보람찬지 모르겠다.
우리는 사소한 것도 차이가 났다.
예를 들면 나는 빨래를 제때제때 돌리는 타입이라면 김백경은 일주일에 한 번씩 돌렸다.
입는 옷이 많이 없어서 일주일치를 몰아서 돌려도 상관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내일은 쇼핑 데이트해야겠다. 이참에 김백경 취향의 옷도 사고 치수가 바뀌었는지도 보고 몰래 선물 사줄 때 참고해야지.
20xx년 xx월 xx일
백화점에 같이 갔다.
김백경은 머리카락 색과 비슷한 갈색 계열의 옷 위주로 봤다. 가을에 책을 읽는 선배 느낌이 나는 목폴라, 니트, 슬랙스. 반대로 나는 시원하고 캐주얼한 계열을 좋아했다. 파란색, 차콜이나 검은색 계열의 맨투맨과 티셔츠, 그리고 청바지. 이렇게까지 스타일이 다를 수 있나? 우리는 골랐던 옷을 서로에게 입히기도 했고 갈아입는 것을 도와준다는 핑계로 따라 들어갔다가 김백경이 여유롭게 웃고 내 손을 가슴팍에 갖다 대며 단추부터 풀어달라고 말하는 바람에 급하게 뛰쳐나왔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거 같다….
그 후 우리는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 지하에 있는 식품 코너에도 들렸다.
같이 커다란 카트를 끌고 사흘 치 반찬과 간식과 필요한 생필품을 보충한다니 마치 신혼부부 같지 않은가?
게다가 색깔만 다른 칫솔? 우리는 세탁 세제와 바디워시, 샴푸도 통일해서 같은 우디향이 짙게 날 것이다. 게다가 다시 옷 코너로 올라가서 같은 무늬에 색상만 다른 파자마까지 샀다.
이게 신혼이 아니면 뭐지? 부부라고? 반박은 받지 않겠다. 벅차오른다.
죽어도 좋아. 아니, 안 좋아. 파자마가 구멍이 숭숭 나게 닳도록 오래오래 살아주마.
+선재야 원 플러스 원이라서 산 거잖아?
어이없어. 너 진짜 귀엽다.
20xx년 xx월 xx일
류선재 바보 똥꾸멍 오늘 거 빼먹었대요
오늘은 내가 써줄게
나는 감자도 좋아해. 녹차라떼, 레슬링도, 피아노도 좋아.
네가 녹차라떼를 좋아해서 나도 따라 마셨고 레슬링을 보는 네 얼굴이 즐거워 보여 나도 따라갔고 네가 피아노를 칠 때 멋있어서 나도 귀를 기울였던 거 같아.
10년 전에 나는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잘 몰랐는데
네가 만들어줬어.
바보야 네가 좋아하는 걸 내가 싫어할 리가 없잖아.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힌트는… 무섭게 잘생겼지만 다정하고 배드민턴은 내가 더 잘하지만 운동 잘하고 요리까지 잘하는 팔방미인. 평소에는 세심하면서 가끔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아.
누구인지는 안 알려줄 거지롱. 잘 생각해봐. 맞히면 상으로 뽀뽀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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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 연애하십니까?”
차유림이 툭 던진 말은 그대로 스트라이크였다. 어, 어? 화들짝 놀라 황급히 관찰일지를 덮고 눈을 끔벅대니 옆에 있던 이혁마저 한바탕 웃었다. 팀장님, 팀장님 지금 얼굴이!
“와씨 뭐야? 얼굴 왜 이렇게 빨개?”
재수 없다! 소리 꽥 지른 한 형사가 지나가고 나서야 류선재는 얼굴에 열이 오른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김백경이 써놓은 메모지를 보고선 온종일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만약 서 내에서가 아닌 집에서 발견했다면 김백경을 깨워 이거 무슨 뜻이냐고 취조하다 출근 시간을 놓쳤을지도 모르겠다. 류선재는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코팅지를 꺼내 소중하게 코팅했다.
김백경한테 뭐라도 연락을 보내고 싶었지만, 하필 핸드폰을 쥐려고 할 때마다 일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절도 현행범 신고가 들어와서 추격전을 벌였다. 류선재는 일찌감치 튀던 절도범이 놀라 나자빠질 정도로 사나운 표정으로 쿵쿵쿵 쫓아가서 체포했다. 취조실에 들어가서 간단하게 심문을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혁과 차유림이 팀장님 표정은 평소같이 무서운데 말을 그렇게 빨리하는 거 처음 봤다며 감탄했다. 그랬나?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인 류선재가 실수한 거 있냐고 묻자 차유림은 범인이 쫄아서 더 빨리 불었으니 장땡이라며 엄지를 세웠다.
“팀장님! 손님 왔는데?”
“손님이요? 누구?”
“저번에 용의자로 오셨던 그 어마무시하…게 잘생긴, 팀장님 나 아직 말 안 끝났는데.”
용의자까지만 듣고 류선재가 뛰쳐나갔기 때문에 강서화는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다. 저분이 그분 맞지? 팀장님이랑 동거한다는. 진짜로요? 팀장님이랑 그, 잘생긴 김백경 씨가? 이혁과 차유림은 동거, 라는 두 글자를 듣자마자 서로를 한번 마주 보더니 류선재를 뒤따라 나섰다.
김백경과 류선재는 서로를 마주한 채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류선재는 벌겋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누르고 있었고 심지어 수줍어 보이는 거 같았는데 이건 그들이 잘못 본 거 같았다.
“팀장님!”
“어, 어 뭐야? 너희들 여긴 왜?”
“어어? 두 사람 옷이!”
김백경은 목티 위로 아가일 패턴으로 짜인 니트를 걸쳤고 바지는 아이보리색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류선재도 색만 다른 니트와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심지어 신발은 둘 다 검은색 운동화였는데 모양도 사이즈도 복사한 듯 같았다.
“두 분이 체격도 비슷해서….”
“비슷해서?”
“쌍둥이인 줄 알았어요!”
순간 긴장했던 게 탁 풀린 류선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얼굴은 완전 다른데? 이란성일 수도 있죠? 두 분 진짜 친하신가 봐요. 옷까지 맞춰 입으시고. 저랑 차유림처럼 영혼의 단짝? 이혁이 촐랑대자 류선재는 이마를 짚었고 김백경은 아리송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한 형사가 헐레벌떡 달려와 와! 커플티냐? 멀리서 봐도 눈에 띈다! 라고 하며 빽 소리 지르고는 다시 사라졌다.
“….”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지만, 순간 온 정적을 가득 감싼 공기는 어색함이 맴돌았다. 류선재는 김백경을 의식하며 벌겋게 오른뺨을 손등으로 눌러 식히다 문득 김백경의 손을 쳐다봤다. 진짜 뜬금없고 제멋대로인 거 아는데 잡아도 되나? 손을 꽉 쥐자 솥뚜껑만 한 다른 손이 마주 잡혔는데 아무래도 이미 잡아버렸나 보다. 김백경이 들으면 왜 뜸 들인 거냐며 어이없어하겠다.
거부당하지 않은 것은 기쁘지만 …억지로 잡은 건 아니겠지? 류선재와 김강휘는 키가 비슷하니까 힘을 들이지 않고 서로의 얼굴이 잘 보였다. 류선재는 김백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이렇게. 김백경의 모습이?
“백경아 너 귀 빨개졌다.”
“…못 본 척 좀 해.”
아씨이…. 그 김백경이 욕지거리하면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거, 설마? 류선재는 용기를 얻어 잡은 손에 깍지까지 끼웠다. 김백경은 움찔 놀랐지만, 손을 빼지 않았다.
집에 어떻게 돌아갔는지 모르겠다. 정신 차렸을 때는 비밀번호를 여러 번 틀려 냉큼 물러가라는 듯 삐삐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너네 집인데 네가 까먹으면 어떡해? 김백경은 그제야 깍지 낀 손을 빼고 기다린 뒤 비밀번호를 눌렀다.
“손 굳이 빼야 했나?”
“조용히 해.”
타박하자 류선재는 김백경한테 달라붙은 채 입을 삐죽 내밀곤 허리에 손을 감았다. 김백경은 피식 웃고는 달래듯이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밥부터 먹자, 바압. 나는 조금 전에 커플! 티 입은 거랑 커플!이 된 거 같다는 얘기 먼저 듣고 싶은데 커플. 일부러 커플이란 단어를 강조하는 게 티가 난 탓에 김백경은 기가 찼다. 류선재 갑자기 왜 이렇게 유치해졌지? 나 원래 유치했는데 루삥뽕 메롱.
“그리고 할 말 더 있는데.”
“뭔데?”
“네가 관찰일지에 써놓은 거 봤어.”
“그걸 벌써?”
“김백경 분명히 말했다. 뽀뽀해줄 거라고.”
“네가 맞혔을 때 말이지?”
“형사의 감이 말해준다. 나는 오늘 안으로 김백경의 뽀뽀를 받아내고 말 거라고.”
음하하하! 우렁차게 웃자 김백경은 못 말린다는 듯이 팔뚝을 때렸다. 아야, 나 죽네. 겨우 이 정도로 엄살은. 김백경이 호… 해주면 나을 거 같은데. 수작 부리지 말고. 아잉… 백경아. 이젠 그냥 아기가 되는 걸로 결정한 거야? 널 어쩌면 좋냐. 김백경은 힘없이 웃으며 도톰한 입을 오므리자 지켜보던 류선재의 눈이 커졌다. 고개를 숙여 류선재의 팔뚝에 바람을 호, 불면 연약한 바람이 살결에 닿는 게 느껴진다. 분명 머리카락 한 올도 겨우 날릴 정도의 바람인데 어째서 연약한 살결을 베어 가른 듯이 따갑고도 간지러운지 모르겠다.
아니, 류선재는 알고 있다. 팔뚝을 살살 문지르던 손이 곧 결의에 찬 듯 주먹을 꾹 쥐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확 뜬 눈이 똑바로 김백경에게 향했다.
“역시 지금 말해야겠다.”
“응?”
“네가 좋아하는 사람.”
“아?”
“솔직히, 내 입으로 말하기 좀 민망하지만, 사실이면 좋겠다.”
“…하하.”
“정답이 뭐냐면.”
류, 랩 하듯이 말했으나 그걸 막는 김백경의 손이 빨랐다. 잠깐만 기다려봐, 선재야. 아니이 왜? 하려던 게 막혀 인상을 팍 찌푸린 류선재는 여유롭게 웃는 김백경의 얼굴을 보고 울컥해 이 순간 김백경한테 뽀뽀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거 같았다. 때문에 김백경 손바닥에 할 기세로 입술을 쭉 내밀었으나 김백경은 재주 좋게 피하며 류선재의 입술을 검지랑 엄지로 잡았다. 초조해진 류선재의 눈썹이 축 늘어트려졌다.
“븍긍으으….”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내 말부터 들어줄래? 얌전히 들어주면 나도 네 답 들어줄게. 류선재가 마음에 안 든다는 티 내며 눈을 가늘게 뜨자 물론 거절하면 나도 입 안 놓아줄 거야. 라고 으름장 놨다. 이렇게까지 막는데 억지로 할 수는 없었다. 먼저 반한 사람이 죄라더니 돌려받는 업보가 크다. 길게 한숨 쉰 류선재는 순순히 물러났고 김백경은 칭찬하듯 말랑한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이건 10년 전의 일이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고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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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23살의 나는 아르바이트하던 국밥집에서 류선재를 처음 만났다. 류선재는 나와 한 쌍의 윷가락처럼 똑같다며 신기하다 했고 그 점이 좋다고 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으면 좋았으랴만 안타깝게도 나는 류선재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나이와 키 빼고는 평행선을 달리는 기분이 드는 사람이었다. 잘생긴 얼굴도 김강휘는 눈꼬리가 축 처져 온화한 이미지고 류선재는 정색하면 시베리아 냉기를 뿜을 거 같은 사나운 인상이었다. 얼핏 듣기로는 같은 학교 선배와 룸메로 지내며 따로 방을 구해서 지낸다고 했는데 김강휘는 홀로 가게에 속한 숙소에서 지내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입에 겨우 풀칠하기 바빴기에 취향도 뭣도 몰랐다. 때문에 류선재가 마시는 음료, 먹는 음식, 취미생활을 그대로 따라 했고 정말 그의 취향이었던 건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던 건지 다행히 즐거웠던 건 진심이었기 때문에 여태껏 들키지 않았던 것 같았다. 류선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귀엽게 웃었는데 나도 함께하니까 더욱 행복해하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나는 배드민턴처럼 두 사람 이상 있어야 하는 일 아니면 굳이 누군가랑 있는 것을 싫어했다. 남과 함께한다는 것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았고 쉽게 지쳐서 혼자 있는 걸 더 선호했다. 하지만 류선재는 주변 사람들한테서 에너지를 얻는 타입인 것 같았다.
류선재는 혹시 자기가 받은 에너지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던 걸까? 류선재와 하는 일이라면 의욕이 샘솟았다. 언젠가 선재에게 둘이서만 지내는 게 제일 편하다고 한 적이 있는데 순도 100% 진심이었다. 알바가 끝나면 샤워하고 침대에 뻗어서 죽은 듯이 자기만 했는데 류선재와 약속이 잡힌 날이면 단장하고 맛있는 걸 먹으며 수다 떨고 돌아다니는데도 체력이 거뜬했다. 행여 지치더라도 류선재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없던 에너지도 모두 끌어올릴 수 있었다.
언젠가 류선재의 눈을 들여다보자 어느 우주에서 별들을 따왔나? 생각들 정도로 찬란히 빛나 나도 모르게 마주 웃은 날이 있었다. 기쁨, 행복, 뿌듯함, 그리고 약간의 벅참. 곧 심장이 콩콩 뛰는데 이건 류선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자각한 지는 오래됐는데 새삼 느낀 바로는 나도 류선재를 줄곧 이런 눈으로 마주 봤을지도 모르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내일을 두려워하게 됐다. 사실 우리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면 그 예쁜 눈동자에 깃든 빛이 꺼져버릴까 두려웠다.
류선재는 세상에 무관심할 거 같은 인상과는 다르게 타인과의 관계를 중요시했고 관심이 생긴다면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성격이었다. 어느 날 <백경>이라는 연극을 보고 감명받았을 때 류선재는 개명하게 되면 그 이름으로 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 물었다. 그렇게 쉽게 결정해도 되는 거야? 너도 마음에 들고 나도 그게 좋아. 그게 좋아? 류선재의 말투를 따라 한 것이었지만 류선재는 갑자기 진지해졌다.
“네가 좋아하는 걸 내가 싫어할 리가 없잖아.”
“방금 설렜다고 하면 믿을래?”
“물론. 저기, 김강휘, 강휘야.”
류선재는 답지 않게 쭈뼛대며 내일 아르바이트 쉬는 날인지 확인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말을 마저 이었다. 전에 내가 말했던 레스토랑 기억나지? 그 웨이팅 길다고 했던? 응, 거기 예약해뒀어. 대단한데, 그걸 또 언제 했대? …12시에 만나서 점심 같이 먹자.
“레스토랑에서 만나면 좀 데이트 같지 않아?”
“그러니까 꼭 와.”
그 결의에 찬 눈빛을 보며 나도 다짐했던 것 같다. 미안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은 고백을 거절한 이후 누명이 씌워진 탓에 어차피 그만두려고 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는 것과 동시에 이사를 하였고 전화번호를 바꾸었으며, 류선재가 다니는 학교와 좋아하는 여행가길 소망했던 장소까지 모두 알기에 재주 좋게 피해 다녔다. 심보가 못됐고 비겁한 겁쟁이 같은 행보였다.
연을 끊는 사람처럼 먼저 도망쳤기 때문에 내게 양심이 남았다면 그를 잊고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결국 잊지 못했다. 류선재와 함께 먹은 음식, 취미 등은 이미 내 취향이 되었다. 물론 류선재와 같이 했을 때만큼의 즐거움은 없었다. 김강휘는 같이 아르바이트하던 친구 서예주가 말했던 것처럼 처음의 설렘이 제일 강한 자극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취향과 취미가 전혀 바뀌지 않는 건 SF 장르의 영화에 나오는 냉동 인간이나 타임 워프한 사람이나 다름없는 걸 안다. 그러나 김강휘는 식어버린 취향과 취미를 놓지 못했다. 애초에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는 없지만, 조금의 자극이 생긴다면 뿌리를 뻗어 취향과 취미가 생긴다. 류선재로 시작한 한 걸음 덕에 김강휘는 자기의 취향이 뭔지 알게 됐다. 물론 류선재와 함께한 취향은 절대 놓지 않았다.
그것이 김강휘 방식으로 류선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염치없는 거 알지만 그때의 기억으로 살았다.
만약, 그때 류선재가 하려던 게 고백이 맞았다면 그 레스토랑에 갈 걸 그랬다.
내일의 류선재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던 나는,
줄곧 그를 만나러 가지 못해 후회에 찬 아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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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세찬은 마지막으로 머문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동생이었다. 싹싹하고 귀여운 동생이라 말을 텄는데 기숙사 생활도 지겹고 월세 비용을 아끼자며 동거를 제안했고 10년 전 류선재와 한규언을 떠올린 나는 수락했다. 생활은 무난했다. 지세찬이 가끔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 외에는 부딪히는 일도 적었고 아르바이트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죽이 척척 맞았다. 그러나 지세찬은 나 몰래 내 물건을 자기 물건인 듯 속이고 여러 여자한테 접근했고 돈을 뜯었다. 갑자기 같이 여행 가자는 문자를 확인하는 동시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류선재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지만, 이딴 식으로 경찰서에서 재회할 줄은 몰랐다. 상황과는 별개로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는지 사복을 입은 경찰들 사이에서 정복 입은 류선재는 특히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안심했다. 어찌 된 팔자인지 아무 짓도 안 해도 휘말리는 일이 많아서 가까스로 빨간 줄이 안 그였지 경찰의 도움을 제대로 받아본 기억이 없기에 솔직히 신뢰하지 않지만, 선재가 경찰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류선재는 10년 전과는 달리 마치 돌멩이라도 보는 듯 싸늘하게 쏘아봤고 나를 범인으로 의심했다. 솔직히 끝이 좋지 않았고 지세찬이 어지간히도 내 행세를 잘한 데다 모든 증거가 나를 향했으니 경찰로서 당연한 취조였지만 서운함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먼저 죄지은 사람처럼 떠난 죄를 이렇게 돌려받는 건가 싶었다. 다행히 피해자 여성이 떳떳하지 못한 일 때문에 숨기다 결국 증언해서 지세찬은 금방 검거됐기에 풀려놨지만 서운함, 슬픔, 안도, 배신감, 속상함, 여러 감정이 합쳐져 복잡했다. 그 나쁜 새끼가 검거되고 부정 탄다고 집주인이 당장 짐을 빼달라고 했고 나 또한 조금도 머물고 싶지 않았기에 냉큼 챙겨 나왔지만 갈 곳도 없었다.
사정을 듣게 된 류선재가 미안하다고 싹싹 빌고 갈 곳 없으면 방 한 칸 남으니까 같이 살자며 동거 제안을 들었을 때는 당연히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줄곧 그를 만나러 가지 못해 후회했던 순간들이 떠올랐고 정신 차렸을 때는 류선재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긍정하는 대답을 했나? 어차피 수락할 생각이었으니 상관없지만, 그것보다 류선재는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소년같이 웃을 수 있구나라는 감탄만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류선재와 재회한다면 10년 전 함께 했던 취미생활을 다시 하고 싶었지만, 왠지 괘씸한 기분에 다시 해 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류선재는 류선재 대로 최선을 다했고 사과의 뜻으로 방까지 빌려줬으니 쌤쌤이로 퉁칠 법도 한데 이럴 때 보면 나도 참 심술궂고 양심이 없는 새끼인 거 같다.
때문에 일부러 가지를 뻗어 쌓인 내 취미와 취향을 내보이며 다녔는데 류선재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히려 좀 감동한 것 같았다. 그랬구나, 응. 이걸 좋아했어? 기쁘다. 알게 돼서 좋아. 다음엔 이것도 같이 해보자. 다음엔 여기도 가보자. 다음에는, 나중에 여기도. 꼭 당연하게 다음을 기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를 만나는 내일을 두려워하던 때가 있었나?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그의 애정을 받으며 내일을 기대하며 눈 뜨는 일이 잦아졌다.
후회가 가득했던 날들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나는 오래간만에 꿈도 행복한 꿈을 꾸었다.
우리는 10년 전으로 돌아갔고,
류선재가 예약했던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우리는 동시에 서로에게 좋아한다며 고백했고 웃긴 상황에 꺄르르 웃음 터트렸다.
10년 차 커플 33살 류선재와 김백경은 기념일 삼아 해외로 여행까지 가게 된다.
꿈에서 깨어나기 싫어 오랜만에 잠투정도 했다. 류선재가 없는 틈을 타 관찰일지에 멋대로 내 취향을 끄적였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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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야.”
“사실, 나도 오늘 저녁에 레스토랑을 예약했는데.”
“손… 잡으니까 아무 생각이 안 들어서. 정신을 차려보니 집이더라.”
…레스토랑 문 닫았겠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꼭 가자. 미련이 뚝뚝 흘렀지만 후련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은 인간관계 속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보는 것도 처음이다. 문득 류선재의 반응이 궁금해 바라보자 훌쩍 우는 소리를 낸 류선재가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눈망울로 마주 보고 있었다.
“왜, 왜 그래?”
“….”
류선재는 후드둑 눈물을 쏟아냈고 당황한 김백경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의 어깨를 붙잡고 눈물을 손으로 훔쳤다.
“저기, 뚝 해봐. 응? 왜….”
“…해서.”
“응?”
류선재는 의젓하게 눈물을 훔치려 했지만, 김백경이 곧 안아서 달래주려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품에 기대 얼굴을 파묻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지 않아도 은은하게 김강휘의 체향이 퍼지자 마음이 충만해져 왔다.
동갑이어도 잔뜩 어리광 부리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류선재는 간단하게 우기며 김백경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비볐다.
“10년 전부터 우리는 서로를 좋아했어.”
“….”
“10년 전에 나를 좋아했다는 게 너무 좋아서. 지금도… 우리는 같은 마음이라서 그게 정말 좋아서.”
“하하….”
“좋아해.”
“응?”
“좋아해, 김강휘. 10년 전부터, 지금도, 아니 그때보다 훨씬 더.”
“…나도. 선재야.”
이제 네가 없는 내일을 상상할 수 없어. 네가 있어서 나를 더 완성해주는 거 같아. 나도 그래. 류선재는 김강휘의 뺨을 부드럽게 그러쥔 것과 대비되게 확 끌어당겨 입술을 붙였다.
똑같은 젓가락 한 쌍 같던 두 사람은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타인이었지만 타인의 조건과는 무관하게 서로에게 끌렸다. 그리고 그들은 만난 날보다 함께 할 날이 더 많을 길을 행진하며 행복하게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