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사이트
그는 빈 방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방 주인이 원체 깔끔한 성격이라 정리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곳곳에 처리해야 할 물건이 널려있던 탓이다. 그는 툭툭 박스 위로 물건을 던졌다. 어차피 처분할 것들이다. 뭐가 이렇게 많아. 그는 몸을 수그려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기엔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어라.”
책장을 눈으로 훑던 중 그의 눈에 낯선 노트가 걸렸다.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빳빳한 책들 사이에 끼어있는 얇은 스프링 노트는 그 공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건 뭐지?”
의아해하며 꺼내들자 노트에는 투명한 비닐까지 씌워져 있었다. 비닐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자 쭈글쭈글한 표지가 눈에 띠었다. 이름은 적혀져 있지 않았다. 남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곳. 먼지가 붙지 않게 소중하게 보관된 노트.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는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노트를 비닐에서 꺼내 앞장을 펼치자 그리드 용지 위로 글씨가 빼곡했다. 누군가가 한 말을 받아적은 듯한 문장, 아래에는 각주처럼 따로 메모도 붙어있었다. 주로 등장하는 이름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류선재’
노트의 주인은 어렵사리 예측할 수 있었다. 유독 키가 크고 낯을 가리던,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남자. 류선재가 그토록 이야기하던….
‘선배’
그는 홀린 듯이 노트의 페이지를 넘겼다.
-
줄곧 날이 흐리더니 오늘은 안개까지 뿌옇게 꼈다. 집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습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김강휘의 머리카락이 습기를 머금어 푹푹 처졌다. 그 탓인지 앞머리가 시야를 방해했고, 그는 안경테 위로 축 늘어진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많이 길긴 했지. 마지막으로 다듬은 게 언제였더라. 시간이 참 빠르긴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있지 않은가.
학교로 향하는 길은 멀었다. 하지만 의식한 적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체격이 큰 김강휘는 보폭이 넓고 걸음이 빨랐으며, 가는 길에 항상 영단어를 외우며 걸었기에 삼 일 분량의 단어를 다 외울 즈음엔 학교에 도착하곤 했다. 그러나 요즘엔 그와는 다른 이유로 등교하는 길이 심심하지 않았는데, 다 그 녀석 덕분이었다.
“형.”
등을 쿡 찔려 뒤를 돌아보니 류선재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김강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단어장을 덮고는 대답했다.
“내가 왜 니 형이야.”
“또 그 소리예요? ”
“됐다. 밥은 먹었어?”
“그럼요, 배째지게 먹었죠.”
“좋겠네. 학교가서 졸지나 마.”
“학교에서 잠을 왜 자요?”
“…아직 그럴 때지.”
김강휘는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류선재는 그런 김강휘의 반응이 이해가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류선재는 아직 파릇파릇한(김강휘도 나이를 대단히 많이 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중학생이었다. 수업시간에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김강휘는 적당한 말을 덧붙였다.
“고등학생 되면 알게 될 거야.”
“두 살 차이 가지고 되게 어른스러우시네요. 곧 있으면 지시봉 잡고 수업도 하시려나?”
“싫냐?”
“아니, 그래서 좋다고요.”
류선재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키득대며 따라붙었다. 김강휘가 다니는 차안고등학교와 류선재가 다니는 무진중학교는 인접해있었다. 이 사거리를 지날 때쯤이면 기이하게도 자꾸 류선재를 마주쳤고, 둘은 교문에서 갈라지기 전까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이 걸어가곤 했다. 김강휘는 한 번도 아는 척을 한 적이 없었으니 류선재의 놀라운 사교성이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류선재와 김강휘가 처음 만난 것은 봄비가 촉촉하게 쏟아지는 날이었다. 우산을 푹 눌러쓴 채 걷고 있던 도중, 고등학교 교문 앞에서 비에 젖은 채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녀석을 발견하고 괜히 말을 붙인 것이 시작이었다.
“그러고 있다가 감기 걸려.”
말을 건네며 잠깐 시선이 마주쳤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꺼풀. 쭉 뻗은 눈썹과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사나운 인상을 자아냈으나, 얼굴 생김새에 앳된 티가 묻어났다. 그 맑은 쪽빛의 홍채에 비치는 물웅덩이와 고요한 아스팔트를 보고 있을 적이었다. 돌연 녀석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지며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럼 뭐, 집에라도 데려가주나?”
김강휘는 그 말을 듣고 3초 동안 생각했다. 미친 놈인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후 가까스로 결론을 내렸다. 미친 놈이구나. 교문 앞에서 청승을 떨고있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질색하려는 걸 겨우 눌러 삼키곤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이나 가려던 참이었다.
“아이 형, 불쌍한 동생한테 우산 한번 좀 빌려줍시다.”
“누가 니 형이야?”
“저보다 나이 많으니까 형이죠. 교복 안 보여요? 저 중학생인데.”
그 정도야 말을 걸기 전부터 알았다. 불쑥 남의 우산에 들어온 녀석은 묻지도 않은 말을 연신 조잘대기 시작했다.
“때마침 형이 지나가서 다행이에요. 아까까지는 머리가 멍해서 비가 오는 줄도 몰랐는데, 정신이 드니까 으슬으슬하고 괜히 춥네요.”
“그래, 다음 번에는 남의 학교 정문에서 그러고 서 있지 말고.”
그 말에 녀석이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비죽였다.
“저라고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거든요? 누나가 불러서. 웬일로 교문 앞까지 오라고 했나 궁금했는데, 시원하게 차버리려고 그런 거였나봐요. 그래도 먼지나게 맞진 않아서 다행이네요.”
“차였어?”
“네, 제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했겠죠. 그래도 먼저 고백해준 만큼 잘해주고 싶었는데.”
“저런.”
별로 공감되는 화제는 아니었다. 김강휘는 누군가를 사랑한 적도, 연애를 해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차였다는 애한테 쌀쌀맞게 대하긴 미안한 나머지 좀 더 말을 붙여보기로 했다.
“그 누나는...뭐래?”
“뭐라고 했더라, 니 동생한테 쏟는 사랑의 절반만이라도 나한테 줬으면 이럴 일은 없었다? 몰라요. 어차피 이제 끝났으니까.”
“서운한 일이 있었나보네.”
녀석은 이별을 겪은 사람 치고는 의연해보였다. 원래 저나이쯤에는 차이면 울고불고 난리나지 않나? 김강휘는 흘러가는 투로 넌지시 물었다.
“...속상하진 않아?”
“물론 속상하긴 한데, 사실 예상했거든요. 며칠 전부터 대답이 묘하게 차갑더라고요. 건수를 잡고싶은 느낌? 뭐만해도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고. 제 입장에선 영문 모를 말이었죠. 이게 그 뜻인 줄은 오늘에서야 알았지만.”
그렇구나, 이별이란 건 예상할 수도 있는 거였구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별로 개의치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예상을 한다고 충격이 줄어드는 종류의 이별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렇게 녀석의 죽여줬던 러브 스토리를 상상하며 계속 걸었지만, 녀석은 여전히 김강휘의 옆에 있었다. 자꾸 말 걸어서 중간에 헤어질 타이밍을 놓친 건가? 김강휘가 물었다.
“그런데 너는 집에 안 가?”
“네? 전 집에 가고 있는 건데요.”
“나도 집에 가고 있는 건데.”
“신기하다. 방향이 같나? 형은 집이 어디에요?”
“알아서 뭐하게.”
“그냥. 이렇게 잘생긴 형은 어디서 사나 궁금해서.”
“한국 안에서 살아.”
“아 네. 미국에서 비행기 타고 통학하시는 줄 알았는데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녀석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진짜 안 알려줘요?”
“어. 내가 왜?”
“내 얼굴을 봐서라도?”
“니 얼굴을 봐서 뭐해?”
영양가 없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자니 피곤했다. 김강휘의 집은 오늘 처음 본 최소 두 살 아래의 남자애에게 말할 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김강휘는 신경질이 나 쏘아 붙였다.
“안 데려가 줄 거니까 신경 꺼.”
그 말을 듣자 녀석이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폭소를 터뜨렸다.
“으하학, 누가 데려가 달래요? 혹시 여친도 이런 식으로 꼬시나?”
“뭐래…애초에 없어. 여친.”
“진짜? 없을 얼굴이 아닌데. 키도 크잖아요. 차안고 혹시 남고에요?”
“그럼 네 누나는 여장남자고?”
“에이, 저는 그런 취향 없어요.”
김강휘는 그냥 머리를 싸매 쥐고 싶었다. 뭐하는 놈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길가에 버리고 가고 싶었다. 그런 김강휘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녀석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안 알려주니까 서러워서 끝까지 쫓아가야겠다. 혹시 집에 금괴라도 묻어놨어요?”
“그렇겠냐? 그딴 거 없으니까 꺼져.”
김강휘는 녀석을 짜증스럽게 밀쳤다. 밀친다고 넘어갈 덩치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한 행동이었으나, 녀석은 그 가벼운 몸짓에 휘청였다. 그만큼 허약했다기보단, 밀칠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어?’
녀석은 뒷걸음질을 하며 겨우 균형을 잡으려했으나, 하필 디딘 곳에 물웅덩이가 있었고, 녀석은 그대로 주욱 밀려 뒤로 넘어졌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아까 장난을 치며 잡고 있던 김강휘의 팔목을 그대로 잡은 채 넘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으아아악!!”
두 남자는 발이 꼬인 채 사이좋게 바닥을 굴렀다. 웅덩이에서 한바탕 넘어져 구르고 정신차려보니 우산은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린 뒤였고, 흰 교복 셔츠는 흙탕물이 묻어 엉망이 되었다. 어두운 색의 바지는 그나마 티가 나지 않았지만, 물을 잔뜩 머금어 몸에 달라붙는 감각이 불쾌했다.
“괜찮아요?”
녀석은 장난기 가득하던 태도를 버리고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 조심스레 내민 손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대답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넘어진 것 정도로 맛이 갈 몸뚱이는 아니었다. 김강휘는 멀리 떨어져 있는 우산을 집어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넘어지면서 다리를 삐끗했는지 빠르게 걷기가 힘들었다.
“택시 타고 가요.”
“유난은.”
“춥잖아요. 집 물어봐서 죄송해요. 가까운 가게 알려주시면 거기 거쳐서 가달라고 할테니까 선배 내리세요.”
“됐으니까 좀 가.”
그 말에 녀석은 말없이 따라 붙었다. 적막이 둘 사이를 휘돌았다.
현재의 분위기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불편했다. 김강휘는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 제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예민하게 반응하고 화를 낸 것은 김강휘가 아닌가. 스스로가 바보같아 화가 났다. 녀석은 붙임성 좋게 다가왔던 주제에 지금은 우산 안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똥강아지처럼 졸졸 김강휘의 뒤만 좇고 있었다.
“야.”
“네?”
“들어와. 다 젖잖아.”
김강휘가 서투르게 우산을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본 류선재가 픽 웃으며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아까는 그런 말 안 했잖아.”
“그러니까 지금 하는 거죠.”
빗방울이 우산을 통통 두들겼다. 발걸음이 그에 박자를 맞추어 나아갔다. 둘을 한참을 함께 걸었다.
-
그 날의 기묘한 인연이 계기가 되어 둘은 말을 텄고, 류선재는 김강휘를 마주칠 때 마다 항상 말을 걸어왔다. 김강휘는 그런 관심에 익숙하지 않았으면서도, 살갑게 말을 붙여오는 사람이 그닥 없었던 탓에 점점 유순하게 그 관심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형, 이거.”
“어, 고마워.”
류선재는 생크림빵을 내밀었다. 남이 주는 것을 넙죽 받아먹다 탈이 난 적이 많아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김강휘가 도통 뭘 먹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는 이유로 이것저것 챙겨주기 시작했다. 거절하는 것이 더 귀찮았던 탓에, 둘은 먹이를 던져주는 주인과 주는대로 덥썩덥썩 삼켜버리는 물고기 같은 관계가 되어버렸다. 남을 챙기는 것은 어쩌면 녀석의 천성인 듯 보였으나, 류선재는 부담갖지 말라는 투로 덧붙이고는 했다.
“아는 동생한테 배고프면 먹으라고 줬는데 싫다고 거절해서.”
“그렇구나.”
김강휘는 빵을 우물대며 대충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건너들은 동생 얘기가 많았는데, 말만 듣자면 무슨 아는 형이 아니라 엄마인 것 같았다.
“되게 잘 챙겨 준다. 집에도 동생 있다 그랬나?”
“걔요? 걔는...중학교 올라가더니 성격이 좀 지랄맞아졌어요.”
“그래도 네 성격이면 잘 챙겨줄 거 같은데. 혹시 사이 안 좋아?”
“안 좋은 것까지는 아니고요. 가끔 투닥거리긴 해도 제가 오빠니까.”
그럼 그렇지. 김강휘는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남은 빵을 한 입에 꿀떡 삼켰다.
“선배는 잘 먹어서 좋아요.”
“별게 다 좋대.”
“선배는 저 안 좋아요?”
“싫진 않고.”
“그거뿐이에요?”
“그거면 됐지. 뭘 기대하는 거야?”
그거 말고 좀 더...류선재는 입술을 우물대다가 이내 꾹 다물고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아 김강휘에게 건넸다.
“됐어요. 그보다 선배, 주말에 저랑 놀러나 안 나갈래요?”
“갑자기? 누구랑.”
“당연히 형이랑 저죠. 단.둘.이.”
무슨 영문일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감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둘이서 따로 볼 이유가 뭐가 있다고. 이거 완전...
‘데이트 신청 아니야?’
스스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질겁해 김강휘는 먹던 바나나 우유를 뿜을 뻔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비슷한 또래간의 관계에 굶주려 있긴 한 모양이었다. 류선재와 김강휘의 관계는 아는 형과 동생. 딱 거기까지가 아닌가. 그조차도 일방적인 류선재의 관심에 비롯한 것이었으며 둘 간에는 그렇다할 썸씽도 없었다.
‘그런데 쟤는 왜 나랑 놀자는 거지? 쟤도 친구가 없나?’
친구가 없을 위인도 아니었고, 두 살 위의 붙임성도 없는 형과 노는 것보단 동갑내기랑 노는 쪽이 훨씬 재밌을 것이었다. 아니면 늘 말하는 그 동생이나. 하여튼 김강휘 본인도 자신이 더럽게 재미없는 성격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더 의아한 것이다.
“넌 나랑 있으면 재밌어?”
이런 만남이 허용 되는 관계인가? 류선재가 건네는 호의에 익숙해질수록 두려웠다. 여태껏 김강휘에게 다가오는 호의나 인연들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죄다 산패하고는 했다. 사실 김강휘는 그걸 두려워한 적조차 없었다. 미움을 사는 걸 두려워 하기엔 그의 인생에 신경쓸 것이 훨씬 많았고... 길지 않은 삶을 이어오는 동안 때론 사랑받는 것이 미움 받는 것보다 불편한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네, 좋은데요.”
걱정이 무색하게 류선재는 시원시원하게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저랑 만나요. 이번주 토요일. 소율 공원 앞에서.”
거부권은 없는 듯한 말에 김강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주말에는 계속 공부할 예정이었고 별다른 일정도 없었다. 하루 정도는 귀여운 동생을 위해 시간을 헌납해도 괜찮지 않을까?
류선재는 맑게 웃으며 김강휘의 왼손을 가져다가 자기 새끼손가락과 꼬았다.
“약속 한 거예요. 새끼손가락 걸고 꼭꼭 약속. 깨면 새끼손가락 자르기.”
“뭐? 너는 말을 무슨 그렇게 해.”
“지키면 상관 없는 거 아니에요? 그럼 저 가 볼게요. 멋있는 옷 입고 나와요! 가능하면 안경도 벗고.”
류선재는 그렇게 폭풍같은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이게 중학생의 밀당 스킬인가? 정신을 빼놓고 먼저 홀연히 사라져버리기나 하고. 김강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뭐 입고 가야 하지?”
-
김강휘는 소율공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어안이 벙벙한 채였다. 이게 깜짝카메라는 아닌가? 그러나 공원 앞에 서 있는 류선재를 보자마자 그런 기억들이 새하얗게 날아가버렸다.
‘쟤는 중딩이 맞나?’
김강휘도 큰 편이었지만 중학교 때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류선재는 중학생임에도 키가 훤칠하게 컸고, 홀로 서 있으니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왔다. 류선재는 흰 반소매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그게 무슨 여름 화보지를 찍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류선재는 김강휘를 발견하고 휘휘 손을 젓더니 김강휘 쪽으로 달려왔다.
“날씨 좋죠.”
“그러게.”
“형이랑 있으니까 더 좋은 거 같은데.”
“그런 말 좀 안할 수 없어?”
“좋은 걸 좋다고 하지 뭐라고 해요.”
류선재는 돗자리를 펴고는 먼저 신발을 벗고 앉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옆을 통통 두드리며 말을 건넸다.
“여기 앉아요.”
옆에 앉자 류선재는 준비해온 것들을 착착 꺼내기 시작했다. 무슨 3단 도시락을 준비해 왔는데, 안에는 주먹밥과 소세지 야채볶음, 후식으로는 사과와 귤, 포도가 들어있었다. 류선재는 야무지게 포크까지 챙겨와 김강휘의 손에 들려주었다.
“먹어요. 더 그럴듯하게 싸오고 싶었는데, 늦게 일어나서 시간이 부족했어가지고.”
“이걸 네가 다 싼 거야?”
“네. 한 번 먹어봐요.”
류선재의 도시락은 외관만큼 맛도 훌륭했다. 김강휘는 한 입 먹자마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포크에 집히는 족족 입에 털어넣다가 반찬을 우물대며 류선재를 향해 따봉을 날렸다.
“맛있어.”
“진짜요?”
“응, 집에 싸 가고 싶다.”
“하하, 더 먹고 싶으면 나중에 또 싸줄 게요.”
류선재는 쾌활하게도 웃었다. 마치 한여름의 태양을 보는 듯한 반짝거림.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따뜻함과 배려심. 그런 면이 좋았다. 그러나 그 애의 앞에 서 있자면 언제부턴가 자신이 미생물처럼 느껴지곤 했다. 햇볕에 타 죽어 버릴 자그마한 생명체...
내가 얘 옆에 있어도 되는 걸까?
김강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나 하는지, 류선재가 손을 뻗어 김강휘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형 머리카락 예뻐요.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서, 황금같아요.”
“무슨. 자기가 더...”
“저 예뻐요?”
“아니, 아닌 거 까진 아닌데, 그 소리가 아니라.”
“그럼요? 저 어때요?”
“그냥, 멋있다고. 아까 공원에서 봤을 때 놀랐어. 교복입은 것만 봤는데 이렇게 입은 걸 보니까 새로워서.”
“형도요. 평소에도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진짜 과할 정도로 잘생겼어요. 눈이 멀 것같아.”
류선재는 그러더니 김강휘의 콧대를 매만졌다. 늘 안경이 있던 부위였기에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류선재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 고민 끝에 집에 벗어두고 나온 참이었다.
“안경, 혹시 제가 벗으라고 해서 벗고 온 거예요?”
“어? 응. 네가 벗고 오라며.”
“하, 미치겠다 진짜. 형은 왜 이렇게 귀여운 짓만 해요?”
“말대로 해도 뭐라 하네.”
“아니이. 그래서 좋다고요.”
류선재는 뭐가 그리 행복한지 큭큭 웃다가 뒤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마침 밥도 먹었고 나른하겠다. 김강휘도 그 옆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무성한 나뭇잎이 둘을 태양으로부터 숨겨 주었다. 모로 누워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류선재와 김강휘는 서로의 눈만 들여다보며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멀리서부터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김강휘는 밀려오는 졸음을 이겨내려 눈을 끔뻑거렸고, 류선재는 그런 김강휘를 보더니 손바닥으로 김강휘의 눈가를 덮었다.
“좀 자요.”
그 말이 신호탄이 되어 눈이 스르르 감겨왔다. 김강휘가 꿈에 빠져들 적, 잠결에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
둘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져버린 후였다. 여름이라 해가 길었던 것을 감안하면 서너시간은 자버린 것이었다. 류선재는 자신이 잠든 것도 몰랐는지 일어나자마자 펄쩍 뛰며 당황했다.
“어떡하죠. 벌써 이런 시간이네.”
“그러게. 완전 폭면했어.”
“시간은 괜찮아요? 집에 언제까지 가야해요?”
“딱히 그런 건 없는데.”
아버지는 김강휘가 오늘 놀러온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말해야할 이유도 몰랐고, 그러니 언제까지 들어가야하는 지는 몰랐다. 김강휘가 누군가와 놀다가 늦게 들어간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 놀고 싶었는데...아,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서 자고 갈래요? 저희 집 그런 거에 프리해서, 친구들 많이 자고간 적 있어요. 부모님 걱정하시니까 먼저 연락하고.”
류선재의 집에 가 본 다면 재밌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안 돼.”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딱히 걱정을 할 위인은 아니었으나, 외박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또한 류선재의 입으로 프리하다고는 했지만 예정에도 없는 사람이 집에 불쑥 찾아오는 게 얼마나 민폐인지 알았다.
김강휘의 단언에 류선재는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싫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김강휘는 괜시리 덧붙였다.
“...다음에 다시 놀자.”
“네, 다음에...”
아쉬움이 묻어나는 발걸음이 서로 엇갈렸다. 둘은 아직 어렸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엔 보호자의 허락이 필요한 나이였다.
서둘러 걷자. 소율 공원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두 시간이었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이 김강휘의 머리 위에서 일렁였다.
-
“어디 갔나 오냐?”
“아는 후배랑 놀고 왔어요.”
“이 시간까지?”
“놀다보니까 조금 늦어져서요.”
아버지는 탐탁지 않은 눈길로 김강휘를 바라보다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서 있던 자리 아래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히 쌓여있었다. 김강휘는 어렵지 않게 아버지가 밖에서 자신을 기다렸음을 알 수 있었다.
‘걱정했나.’
평소에는 기다려도 늦게 들어오더니, 오늘은 일찍 들어온 주제에 쉬지도 않고 기다리기나 하고, 부자가 쌍으로 바보같았다.
키가 커지면서 볼 수 있는 풍경이 많아지는 것처럼 나이를 먹으면 그전까지는 몰랐던 것들을 알게된다.
어린이가 몰라도 되는 것은 잔뜩 있다. 어른이 알아야 할 것도 잔뜩 있다.
그렇다면 그 사이인 청소년은 어떤가? 국영수는 알아야 하고 집안 사정은 몰라도 된다. 미성년이 집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지양해야한다. 보호라는 것은 책임을 지지 않게 하는 행위도 포함한다. 앎은 어쨌거나 압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도 어찌 모른 척 하겠는가. 김강휘는 닳아빠진 아버지의 작업화를 모른 척 할 수 없다. 새벽을 가르는 신발 앞코를. 하루를 구기는 뒤축을 모르지 않는다. 그 정도로 어린 적은 애당초 없었다. 그는 교복을 입고도 홍등가를 지나다녔으며 집의 내벽은 한숨을 유리시킬만큼 두껍지도 않았다.
붕 떠 있던 의식이 현실로 되돌아 왔다. 곧 있으면 기말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달고살았던 말을 복기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 공부나 해라.
중학생인 류선재가 노는 것은 괜찮다. 아직 어리고, 그때까지는 놀면서 해도 별 상관이 없으니까. 그러나 김강휘는 중학생이 아닌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아버지의 지론에 따라 대학은 가야했다.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했다.
김강휘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펼쳤다. 1지망인 P대학 경영은 적당히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머릿속을 휘젓는 류선재의 웃음을 지운다. 그 안에 수학 공식을 넣는다. 그와 동시에 골수에서 외로움이 분화했다. 외로움의 제곱은 괴로움. 미분하여 썰어내도 금방 다시 살아나 슬픔상수가 덧붙고. 누덕누덕해져가는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다.
김강휘 – 류선재 = NULL
김강휘는 공활한 노트의 격자 위에서 어리숙한 마음의 이름을 깨닫는다. 묻어나는 아쉬움의 기원을 찾아낸다. 결국 전부,
사랑이었다.
김강휘는 감정을 보기 좋게 꺼내어 장식해두는 법을 모른다. 연애편지니, 꿀이 쏟아지는 말을 지어내는 재주도 없다. 사랑을 하면 모두 시인이 된다던데, 그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인간이었다.
노트를 꺼내 너를 필기한다. 촘촘한 격자 선 위로 삐침이 많은 글씨가 수북히 담겼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는 쌓여가고 있다. 공백을 메운다. 너의 부재를 메운다.
그것이 가슴 속에 내리기 시작한 비를 긋는 방법이었다.
-
좆됐다. 좆된 이유는 차차 설명하겠다.
“형 이거 떨어졌어요. 잠깐만, 어?”
류선재가 방금 주운 김강휘의 노트는 어제 공부를 하다 새벽 감성에 젖어 아무말이나 지껄여둔 노트였고, 하필이면 바닥에 떨어진 페이지가 류선재에 대한 말만 잔뜩 써둔 페이지였다. 류선재는 노트를 보더니 아무 말이 없었다. 김강휘는 혀를 깨물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러 참아냈다.
‘정 떨어졌겠지. 끔찍하다고 생각하겠지. 몇 대 때려도 할 말이 없다. 맞아주자.’
김강휘가 이를 꽉 물고 다가올 머리통과 주먹의 접선을 기다리는 도중이었다.
“저 이거 가질래요.”
“뭐?”
저 자식 진심인가? 김강휘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류선재를 바라보았다. 류선재는 노트에 얼굴을 파묻고는 너무 좋다며 연신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가 노트에 닿아 울렸는데, 그게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너무 좋아요. 저에 대해 쓴 거니까 이건 제 꺼잖아요. 그러니까 가질래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얼른 내놔.”
김강휘가 황급히 손을 뻗자 류선재는 노트를 품에 꼭 안다 못해 뺏길세라 셔츠 안에 쑥 넣어버렸다.
“이, 무슨, 뭐하는 거야?”
“아무리 선배라도 이건 못 줘요.”
“하...내가 쓴 거잖아. 돌려줘.”
“안 돼요. 집에 가져가서 액자에 전시할 거라.”
“진짜 장난치지 말고.”
“장난 같아요? 난 진심인데.”
“선배 여기서 이거 가져가면 저 내일부터 교문 앞에서 스케치북 들고 러브 액츄얼리 찍을 거예요. 선배가 말려도 매일매일. 에브리데이.”
저 자식 진심인가? 결국 지친 김강휘가 먼저 물러섰다.
“알았어. 가져가서 국 끓여먹든 코팅해서 가훈 옆에 걸어 놓든 상관 안할게. 그건 좀 봐 주라.”
“앗싸. 무르기 없기.”
그 말을 들은 류선재의 표정은 흐늘흐늘 풀려있었는데, 좋게 말하면 귀여웠고 나쁘게 말하자면 변태 같았다. 김강휘는 진지하게 류선재의 일그러진 취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변태 아니야? 누가 저런 걸 보고 좋아해?’
그러나 변태라고 한다면 저런 걸 쓴 자신이 가장 변태같았기에 할 말이 없었다.
-
류선재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어느정도냐면, 날아갈 것처럼?
“뭐가 그리 재밌어서 존나 낄낄대는데.”
“즐.”
“또 여친이랑 한 문자나 돌려보는 거겠지. 알만하다.”
“아니거든?”
“아 예예.”
류선희는 기분이 과하게 좋은 혈육이 거슬렸는지 몇 마디 툭툭 쏘아붙이고 사라졌다. 그렇지만 기분이 하나도 나쁘지 않았다. 그야 나는 형이 써준 노트가 있으니까!
두 살 위의 김강휘 형은 어디서 귀여운 짓을 연구하는 학원에 다니는지 하루가 다르게 깜찍한 짓이 늘었다. 처음 해보는 짝사랑에 전전긍긍하던 때였으나, 이 노트를 보자마자 확신했다. 이건 쌍방이었다.
‘고백은 언제 하지?’
고백을 받아본 적이나 있지 해본 적은 없어서 어떻게 해야하는 지 망설여졌다. 고백은 돌진이 아니라 확인이다. 그리고 지금은 형도 자신과 마찬가지 일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비로소 고백을 던질 준비가 된 것이다.
류선재는 김강휘의 노트를 펼치고 그 위로 떠오르는 생각을 마구잡이로 적기 시작했다. 고백을 하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는 게 좋을지. 뭐라고 하는 게 좋을지.
노트 위로 상상의 개울이 흘렀다. 류선재는 달콤한 망상의 축복을 맛보았다.
-
모든 일이 상상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았을까?
“형!! 어디 가요!!”
누가 고백 상대가 고백을 받자마자 도망갈 것이라고는 생각이나 했을까? 고백한답시고 차려입었더니 옷이 불편해서 제대로 뛸 수도 없었다.
“대체 왜 도망가는 건데요? 좋다면서요!”
“내가 언제 그랬어?”
“노트에 한가득 썼더만!”
“우라질. 그게 이거랑 같냐?”
“일단 좀 멈춰보라고요!”
신발 밑창이 조금만 미끄러웠어도 주루룩 미끄러져 넘어질 경사였다. 시간만 나면 축구니 농구니 공잡고 뛰느라 단련된 류선재였기에 겨우 따라가는 것이지, 아니었더라면 중간에 낙오 했을 것이다. 형은 어떻게 저렇게 잘 뛰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평소에 공놀이 해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류선재는 기운차게 발목을 접질렸다.
“형 잠깐만우아악?!”
우당탕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진 류선재는 아스팔트와 진한 키스를 나눴다. 아픈 것보다 쪽팔렸고, 머리가 아파서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머리통 쪼개진 거 아니야?’
“이 무슨, 류선재!”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던 김강휘는 류선재가 넘어진 걸 확인하고 바로 돌아 류선재에게 달려왔다.
“괜찮아? 일어설 수 있어?”
류선재는 쪽팔림에 말 한마디 꺼내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이때를 놓치면 영영 잡지 못할 것이란 걸 동물적으로 직감한 류선재는 다가온 김강휘의 허리를 잡고 끌어당겨 자신의 위로 넘어뜨렸다.
“야! 놔!”
“싫어요! 놓으면 도망갈 거 잖아요!”
“그럼 도로 한복판에서 이러고 있게? 남자 둘이서?”
“저는 여기서 역사를 쓸 수도 있는데요?”
“진짜 제대로 미친새끼...”
김강휘가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몇 번 바둥거려보더니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몸에 힘을 풀었다. 류선재는 달래듯이 김강휘에게 물었다.
“이제 말해봐요. 왜 도망갔는데요?”
“너는...싫어서 도망갔다는 생각은 아예 안하는 거야?”
“그럼 형은 싫은 새끼 넘어져서 도망치다가 다시 돌아왔고요.”
그 말에 김강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얼굴을 쓸었다. 형형한 가로등 빛이 머리 위에서 부서졌다. 류선재는 숨을 참고 그 광경을 전부 눈에 담고자 노력했다.
‘왜 도망쳤냐고? 나도 그걸 모르는데 어떡해.’
김강휘는 어수룩했다. 어리고 서툴렀다. 실제로 어린 탓도 있었으나, 또래와 살부딪히며 논 기억이 없는 것도 큰 축을 차지했다. 원하지 않는 관심은 무겁고 때론 날카로우며 가시처럼 그를 찔러댔기에 상처는 안쪽으로 아물었다. 굳은 살이 박인 마음으로 사랑같은 살캉살캉한 감정이 지나들기엔 길이 험했다.
“사랑해서.”
“내가 너를...너무 사랑해서 무서웠어.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나는 솔직히 좋은 사람도 아니고, 재밌지도 않고, 그런데 자꾸 욕심이 나서.”
김강휘는 숨을 한번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너를 망칠까봐 두려웠어.”
완성되지 못한 문장이 흩날린다. 엉망진창인 고백이 흐드러졌다.
“...형.”
숨이 멎을 것처럼 황홀했다. 삶이 한 권의 책이라면, 책갈피를 끼워 두고두고 되돌아 보고싶을 순간이었다. 류선재는 김강휘에게 몸을 기대었다. 살갗 사이로 서로의 쿵쿵대는 심장소리가 이어졌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어요.”
류선재는 말간 얼굴로 웃어보였다. 만년설마저 녹여버릴 따뜻한 웃음이었다. 그 열기에 시야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김강휘는 알고 있다. 이건 찰나의 충동이고, 치기이고, 순간이다. 사랑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 그런 무거운 단어를 자신같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그는...
“나도.”
책임지지 못할 영원을 입에 담았다.
그 말은 거짓이면서도 진실이었다. 그는 이 순간이 영원하리라는 기대조차 없었다. 다만 그의 눈빛 안에 녹은 사랑이 그를 영원히 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을 뿐이다.
맞닿은 서로의 시선에 불꽃이 튀겼다. 폭죽처럼 터져 날아가는 의식, 입술이 겹친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
그는 노트 위에 쏟아져 내린 사랑의 흔적을 보다가 이내 손을 부르르 떨었다. 힘이 들어간 손끝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미쳤어. 내 순진한 아들이. 우리 착한 선재가.”
그는 분에 못 이겨 노트의 페이지를 뜯었다. 스프링에 매달린 사랑이 주루룩 뜯겨나갔다. 아삭거리는 마음의 한 중간을 찢고, 구겨버린다. 짓이길수록 풋내가 진동한다. 어리석은 마음에 붙은 사랑이라는 딱지를 긁어내리려 손톱을 세웠다.
그는 찢어낸 노트의 페이지를 변기에 처넣고 물을 내렸다.
한여름의 순정은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침몰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