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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정말 자야 할 시간이에요
*
"다녀왔습니다."
김강휘는 조용히 인사하며 집에 들어섰다. 거실 불이 여전히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서둘러 류선재를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어물어물 신발을 벗는 그를 재촉해서 방 안에 밀어 넣은 김강휘는 그의 신발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방문 앞에 어색하게 서 있는 류선재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추위 때문에 빨개진 얼굴에 눈물 자국이 더해진 모습이 꼭 엄마를 잃고 길가를 배회하는 아기 강아지 같았다.
"옷 벗어서 줘. 내가 걸어놓을게."
"제가 걸게요."
"됐어. 방 나가면 바로 왼쪽이 화장실이거든? 가서 세수부터 하고 와. 너 지금 완전 바보 같아."
"……."
김강휘는 말없이 외투를 벗어 건네는 류선재의 손등을 스윽 쓰다듬어 주곤 방문을 향해 턱짓을 했다. 그에 류선재는 슬쩍 눈을 피하더니 김강휘의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김강휘가 그의 손을 밀어내자 그제서야 등을 돌려 방을 나섰다.
김강휘는 류선재가 방을 나서자마자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작스러운 류선재의 방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수능이 끝난 지 일주일째였다. 원래라면 학교에 가야 했지만 김강휘는 병결을 내고 이틀째 칩거 중이었다. 자정을 막 넘겼을 무렵, 종일 밥도 먹지 않고 방에 처박혀 자다 깨다 하던 김강휘는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김강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류선재였다. 당장 전화를 받으려던 그는 문득 만 하루 동안 연락이 없던 류선재가 괘씸하여 전화를 받지 않고 폰을 엎어버렸다. 그러나 김강휘는 벨 소리가 끊기자마자 후회했다. 그냥 받을 걸.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김강휘가 떨리는 손으로 최신 통화 기록에 들어가던 참이었다. 류선재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서, 선배. 저 폰을 이제 고쳐서…… 괜찮아요? 많이 안 다쳤어요?'
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류선재는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어떻게 연락 한번을 안 하냐'며 쏘아붙일지, 아니면 '이제야 내가 생각났냐'며 비꼴지, 그것도 아니라면 '무슨 소리냐'며 시치미를 뗄지 고민하던 김강휘는 그 말에 힘이 다 빠지고 말았다. 자신은 이런 류선재를 두고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보고 싶어, 선재야."
그래서 김강휘는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 말에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류선재는 누가 들어도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김강휘에게 어디냐고 물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한 김강휘는 다급히 그러는 너는 어디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류선재는 선배네 집 앞이라고, 3시간째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
조용히 현관으로 간 김강휘는 옷으로 도어락을 덮어 소리를 죽인 후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튀어나온 류선재의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집 앞이라는 말에 당연히 공동 현관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러나 김강휘가 정말로 궁금한 것은 류선재가 집 호수를 어떻게 알았냐는 것이었다. 그는 류선재에게 집을 알려준 적이 없었다. 삑삑대는 도어락 소리에 급히 문을 닫은 김강휘가 '너 어떻게'로 운을 띄우려 하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류선재가 큽, 코 먹는 소리를 내며 그를 끌어안고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김강휘는 생각보다 큰 울음소리에 당황하여 황급히 류선재를 비상계단으로 이끌었다. 비상문을 닫자마자 류선재는 김강휘를 끌어안고서 선배 미안해요, 라는 말을 하며 서럽게 울었다.
한참을 울던 류선재는 김강휘가 그를 달래기 위해
"왜 울고 그래……."
"규언 쌤이 문제 없을 거랬어."
"연락 못 해서 미안해."
같은 말을 열 번쯤 반복했을 무렵에야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코를 훌쩍대다가 옷깃으로 눈을 닦았다. 그러고 그는 '선배가 미안할 게 뭐 있어요'라며 씩씩한 소릴 했는데, 다시 김강휘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내
"그 새끼 내가 죽여버릴 거야."
라는 다소 폭력적인 다짐을 하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김강휘는 이러다 여기서 밤을 새울 수도 있겠단 생각에 류선재에게 시간이 늦었으니 일단 집에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했다. 그 말에 류선재는 '어느 집이요?' 하고 속 터지는 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금세 진정하고 조용히 김강휘의 뒤를 따랐다.
그렇지만 류선재는 여전히 김강휘의 얼굴을 볼 때마다 열이 뻗치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강휘는 입술이 터지고 한쪽 광대와 볼 전체에 시퍼렇게 멍이 든 상태였다. 씹새끼한테 세 대를 맞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원리 원칙과 정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류선재가 차마 학폭위와 신고 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김강휘의 얼굴에 멍을 남긴 폭력 사태는 김강휘의 선빵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
화장실에서 돌아온 류선재는 한결 멀끔해 보였다. 눈이 퉁퉁 부은 탓에 그는 반만 눈을 뜨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콩깍지가 씐 김강휘의 눈에는 그것도 괜찮게 보였다.
김강휘는 그에게 잠옷을 건네준 후 자신도 화장실로 향했다. 손을 씻고 세수를 하고 방으로 돌아오자 류선재는 그새 김강휘의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걸터앉아있었다. 그 모습에 김강휘는 순간 긴장이 풀려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었다. 긴장한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꽤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왜 그래요?"
"아니야. 춥다, 일단 누워서 얘기하자."
"……저 오늘 자고 가요?"
"그럼 집 가려고 했어?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자고 가."
"네……."
"불 끈다?"
"네."
김강휘는 류선재가 침대에 눕는 것을 보자마자 불을 끄고 감을 따라 침대로 향했다. 류선재가 김강휘가 눕기 편하게 이불을 들어주어 그 속으로 몸을 쏙 집어넣었다. 따뜻한 온기에 온몸이 풀어지는 듯했다. 류선재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그런 와중에 류선재는 손장난을 걸어왔다. 한참 동안 류선재와 손가락을 얽고 손바닥을 간지럽히며 놀던 김강휘는 그의 손에 깍지를 껴 장난을 끝냈다. 다음날 늦지 않게 일어나 류선재를 학교에 보내려면 일찍 자야 했다. 여기서 장난을 더 쳤다간 정말 사고를 쳐버릴지도 몰랐다…….
"일단 자자. 내일 학교 가려면 지금 자야지."
"저 안 졸린데. 근데 선배 내일은 학교 가요?"
"아니, 나 내일까지 병결."
"아쉽다."
"내일 학교 마치고 또 만나면 되지. 그러니까 어서 코 하자, 알겠지?"
"네. 코 할게요……."
그러나 옆에 류선재가 누워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김강휘는 쉽사리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류선재의 숨소리는 자장가보단 알람 소리에 가까웠다. 잠이 들려다가도 심장이 뛰며 정신이 선명해지는 그런 소리였다.
김강휘는 애써 잠을 청하다 저녁에 한규언 쌤으로부터 받았던 전화 내용을 떠올렸다. 그는 통화에서 김강휘를 때린 학생(이자 동시에 김강휘에게 맞은 학생)이 이 일을 조용히 넘기길 원한다는 것을 전해왔다. 그는 결과가 쌍방 폭행인지라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를 떠나 둘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이어서 한규언 쌤은 김강휘에게 어떻게 하길 원하냐고 물었더랬다. 그는 네가 대학에 붙은 게 다름없는 마당에 굳이 변수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말하며 학폭위까지 가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김강휘를 향한 걱정이 담긴 첨언이었다. 그 말에 김강휘는 자신이 좆되든 말든 그 새끼를 조져놓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피해학생(이자 가해학생)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 대답했다. 다만 사과는 하지 않을 거라 단언했다. 그건 죽어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대답에 한규언 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김강휘에게 잘 생각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네 의사를 그쪽에 전해두겠다며, 다음 주에 있을 대면 면담에 꼭 나오라고 당부했다. 통화는 한규언 쌤이 '그 학생으로부터 대충 상황을 듣긴 했지만, 나중에라도 강휘 네가 직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에게 얘기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선배 자요?"
"아니."
"그럼 선배.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음, 뭔데?"
"혹시 어제… 왜 그런 거예요?오늘 규언 쌤한테 물어보니까 쌤이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더라구요……. 근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요."
"뭐 들은 게 있는 거야? 정말 별 이유 없었어."
하지만 김강휘는 자신이 그 학생을 때린 이유에 대해 소명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려면 김강휘는 필연적으로 그 씹새끼가 했던 말을 이야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강휘는 자신이 그 얘길 해서 그 새끼를 좆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그 말을 꺼내놓고 싶지 않았다.
"어제 걔가 수거장에서 분리수거로 아는 척을 막 하는데 그게 너무 꼴 보기 싫더라고."
"그래서요?"
"그래서 그냥 때렸어."
"아, 장난 치지 말구요."
"진짠데."
"선배가 그냥 그럴 사람은 아니니까 하는 이러는 거잖아요! 이유가 있을 거니까... 알려주면 안 돼요?"
"근데 얘기해줄 게 정말 없는데. 정말 그게 전부라니까?"
그것이 류선재와 관련된 것이었기에 더욱이.
*
그 씹새끼의 발언에 김강휘가 주먹을 내지를 정도로 화가 났던 것은 그것이 류선재의 조건에 대한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류선재의 조건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한때 김강휘에게 그것은 말 그대로 꿈에서 겪을 법한 환경 같은 것들이었다. 앞선 수험생들의 수능이 끝나고 김강휘가 그 차례를 넘겨받았을 무렵이었다. 그즈음 김강휘는 끝이 기억나지 않는 요상한 꿈을 자주 꾸었다. 그 꿈에서 김강휘는 현재의 자신과 아주 다른 삶을 살았다. 그곳에서 김강휘의 엄마는 돌아가시고 없었으며 김강휘는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판잣집에서 살아야 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꿈 속에서 김강휘는 자신의 그 불우한 조각들을 떼어내어 분리수거 하고 싶어 했다. 설령 그것들이 탄로 날까 봐 갖은 애를 썼다. 누군가 자신을 오해해도 굳이 정정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그것을 숨겼으며, 가끔은 적극적인 거짓말로 그것을 숨겼다. 쓸데없이 현실적이고 소모적인 꿈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막상 꿈에서 깨어 꼼꼼히 살펴보면 헛웃음만 나오는 '꿈'이었다. 왜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짐작이 되는 부분이 몇 있는가 하면, 왜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 부분이 허다한 꿈이었다.
가령 김강휘의 꿈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그나마 어머니의 건강에 대한 자신의 무의식적인 염려가 반영된 것이라 생각해볼 만 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관계는 도무지 자신의 무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비록 김강휘와 그의 아버지는 살가운 부자 관계라고 하기는 어려웠고 그의 아버지는 마음을 잘 표현할 줄 모르는 이였으나, 김강휘의 아버지는 분명 김강휘를 사랑했다. 그리고 김강휘는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를 대하듯 살갑게 대하진 못하더라도 마음 깊이 사랑했다.
한편 김강휘는 아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돈 걱정을 하며 자란 것도 아니었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차례로 졸업한 후 적당히 취업하여 적당히 잘 먹고 적당히 잘 살 것이란 막연한 생각도 있었기에 미래에 대한 불안이 큰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김강휘는 그 꿈을 되짚어보며 자신이 무의식중에 입시를 망치고 인생까지 망칠까 불안했던 걸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그런 불안이 꿈에서 가난을 상징하는 판잣집으로 나타났던 걸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김강휘가 꿈속의 그 불우한 조건들을 자신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어디까지나 타인의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강휘가 꿈에서나 겪을 수 있었던 그 모든 조건들은 모두 류선재의 삶을 구성하는 현실이었다.
*
"정말 말 안 해 줄 거예요?"
"응."
"정말로요?"
"응."
"정말?"
"응."
류선재가 '정말'이라고 말할 때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체육관 창고에서 입도 몇 번 맞춘 사이였으나 김강휘는 류선재와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바짝 긴장하곤 했다. 문을 잠갔던가. 류선재가 의식하지 못한 채 김강휘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동안 김강휘는 의식적으로 그에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의미없는 문답을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류선재는 물러났다. 김강휘는 삐진 척을 하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린 류선재를 바라보다가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그 기척을 느낀 류선재는 김강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말없이 눈을 마주치고 있자 초침 소리가 방을 채웠다. 그러나 조용한 방 안엔 잠드는 이 하나 없었다. 그때 류선재가 입을 뗐다.
"그럼 저 다른 거 물어봐도 돼요?"
"들어보고 말해줄 수 있는 거면."
"이건 꼭 대답해줬으면 좋겠는데."
"뭐길래? 일단 말해봐."
"대답해줄 거예요?"
"들어보고?"
"잉, 미워요."
"아, 귀여워. 너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선배만 하겠어요. 그리고 원래 사랑하면 닮는다잖아요."
김강휘는 대놓고 앙탈을 부리는 그에게 말려선 안 된다는 자각이 있었으나 이내 류선재의 코를 톡 건드리며 그에게 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냐 묻고 말았다. 이게 다 류선재가 귀여운 탓이었다.
그러자 류선재는 김강휘가 건드린 코 끝을 한참 동안 만지다가 그와 맞추고 있던 눈을 내리깔더니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류선재가 자신의 코를 누르며 아기돼지 꿀꿀, 같은 소리를 할 거라 생각하던 김강휘는 긴장한 그의 모습에 그제서야 류선재가 어렵게 꺼내는 이 질문이 본론이었단 걸 깨달았다.
"…여름에요."
"응."
"혹시 저 돈 없어서 저녁 못 먹는 거 알고 일부러 도시락 싸 온 거였어요?"
*
학교에서 여름 방학 자습을 하던 김강휘가 점심시간에 함께 배드민턴을 치자는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체육관을 갔을 때였다. 김강휘의 친구들은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구석의 코트로 달려갔다. 그 코트에는 누군가 배드민턴 채 4개를 품에 안은 채 그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김강휘는 그런 류선재에게 첫눈에 반했다.
김강휘의 친구들은 류선재를 두고 여름 자습이 시작됐을 때부터 같이 배드민턴 게임을 해온 1학년이라고 소개했다. 류선재가 워낙 잘 치다 보니 경기를 할 맛이 난다고.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대충 두 게임 정도만 설렁설렁 치고 교실로 돌아가려던 김강휘는 그날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게임을 했다. 잘생긴 류선재는 경기 매너까지 좋았다.
그 이후로 김강휘는 매일같이 체육관을 찾아 친구들, 그리고 류선재(메인은 이쪽이었다)와 함께 배드민턴을 쳤다. 그러면서 김강휘는 류선재와 단 둘이서 배드민턴을 치고 싶단 바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류선재랑 더 친해질 수 있을 거였다……. 그런데 얼마 뒤, 김강휘는 정말로 류선재와 단 둘이서 배드민턴을 치게 되었다. 김강휘를 배드민턴의 길로 이끈 그의 친구들이 농구로 변절하여 배드민턴을 때려치운 덕이었다. 슬램덩크 극장판 개봉의 여파였다.
한편 류선재와 김강휘는 더 열심히 배드민턴을 치게 되었다. 그걸 보던 체육 쌤(한규언 쌤)이 감탄할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류선재는 한규언 쌤에게 애교를 부려서 기어코 체육관 창고 사용권을 따내었다. 그 후로 김강휘와 류선재는 점심시간마다 제일 먼저 배드민턴 게임을 시작하고, 마지막의 마지막 시간까지 게임을 하다가 교실로 돌아가곤 했다.
8월을 막 넘길 무렵부터 둘은 저녁 시간에도 만나 배드민턴을 치기 시작했다. 하루에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김강휘는 류선재가 좋아졌다. 류선재는 발에 박힌 자그마한 유리 조각처럼 김강휘의 머릿속에 박혀 종일 김강휘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차마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릴 순 없었던 김강휘는 류선재를 좋아하지 않는 척했다. 심란한 나날이었다.
*
그 즈음 김강휘는 진학 상담으로 교무실에 들렀다가 류선재가 장학금을 받아야 학교를 다닐 수 있을 만큼 가난하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강휘는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그런 이야기를 학생이 듣는 데서 한 선생님에게 때늦은 분노를 느꼈다. 그러면서 그는 동시에 타인의 삶이 자신의 삶 안으로 성큼 발돋움하는 것을 느꼈다. 김강휘가 꿈에서나 가졌던 그 조건들은 이제 더 이상 타인의 조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김강휘는 류선재가 점심은 사 먹지만 저녁은 굶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의 도시락을 싸는 어머니 옆을 기웃거리며 2인분 같은 1인분 도시락을 쌌다. 그러곤 류선재에겐 어머니가 도시락을 너무 많이 싸주셨다고 하며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다행히 류선재는 김강휘와 함께 먹는 저녁을 좋아했다. 그래서 김강휘는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도시락을 싸갔다. 둘은 먼지 쌓인 체육관 창고에서 매일 함께 밥을 먹었다. 그러는 동안 김강휘는 멋대로 그를 위하고 있다는 옅은 죄책감을 느꼈다.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 알 수 없었으나 김강휘는 류선재가 상처받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러는 사이 여름 방학 자습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김강휘는 밥을 먹고 체육관 창고를 나서다 말고 류선재에게 앞으로도 저녁을 함께 먹지 않겠냐고 물었다. 류선재를 향한 김강휘의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져 있을 때였다. 그런데 류선재는 김강휘의 말에 얼굴을 붉히더니 '죄송해요'라고 대답했다. 그의 거절에 김강휘는 애써 실망하지 않은 척 굴었으나 꽤나 큰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곧 이어진 류선재의 말에 김강휘는 그만 매트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 선배 좋아해요……."
*
그래서 류선재의 사정을 아는 김강휘는 류선재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한규언 쌤이 시킨 심부름을 하러 간 분리수거장에서 그 새끼가 너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것을 들었다고. 그 새끼가 네가 장학금을 받는 것을 말하고, 너네 집 형편이 가난하다는 것을 말하는 걸 들었다고.
그리고 류선재를 좋아하는 김강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새끼가 저녁을 굶어야 했던 류선재의 가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는 것을. 가난도 이제는 하나의 스토리라고 말하는 것을. 가난하니까 악착같이 공부할 수 있는 거라 말하는 것을.
*
"…미안. 불쌍하다거나 그래서 그런 건… 나는 그냥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서…"
"아녜요, 전 좋았어요. 선배가 저 불쌍하게 여겨서 그랬다고는 생각도 안 해봤구요. 저는...."
"……."
류선재의 말끝이 떨려오는 것에 김강휘는 그제서야 류선재가 벌벌 떨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모습에 김강휘는 꿈지럭 움직여 류선재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식은땀이 밴 손이 축축했다. 그러나 류선재는 깍지를 끼는 대신 손을 빼내었다.
"...선배는 제가, 제가 선배가 생각하는 것만큼 잘 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어떨 것 같아요?"
"난… 뭐가 달라질 것 같진 않은데."
"제가 판자촌에 산다고 해도요?"
"응."
"엄마도 없고 아빠랑만 산다고 해도요?"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근데 왜 이렇게 떨어, 선재야."
"…그래도 괜찮아요?"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나 너 좋아한다니까?"
"구질구질해서 질릴 수도 있잖아요."
"구질…,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김강휘는 좀처럼 진정할 줄 모르는 류선재를 꼭 끌어안았다. 류선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햄스터처럼 김강휘의 품을 파고들었다. 팔을 들어 공간을 만들어주자 그 속으로 머리를 쏙 집어넣기까지 했다.
류선재는 김강휘의 가슴팍에 머리를 부비며 마구 어리광을 피우더니 '선배'하고 김강휘를 불렀다. 그 귀여운 모습에 아리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참지 못하고 웃어버린 김강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왜,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류선재는 김강휘가 숨도 못 쉬게 꽉 안아왔다. 그러곤 우다다 말을 쏟아내었다.
"저 사실 폰 고장났다던 거 거짓말이에요. 한규언 쌤한테 얘기 다 들었어요, 그 새끼가 제 얘기 해서 때린 거였다면서요."
"선재야,"
"그 얘기 듣고 나니까 도저히 선배한테 연락할 수가 없었어요. 선배한텐 절대 말하기 싫었는데 선배가 다 알아버렸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무서워서…. 선배가 저를 싫어하게 됐을 까봐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요."
"선재야, 잠깐만,"
"죄송해요. 근데 앞으로는 누가 그런 소리해도 그냥 무시해버려요. 선배가 다친 거 보니까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러나 전부 우스운 이야기였다. 김강휘는 그를 싫어할 수 없었다. 한때 타인의 삶이었던 것들은 이제 사랑하는 이의 삶이었다. 그 삶을 어떻게 경멸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김강휘는 류선재에게 무어라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해줄 말은 많았지만…… 류선재가 너무 꽉 안아 숨을 쉴 수가 없던 탓이었다. 배드민턴을 할 때부터 느꼈지만 류선재는 힘이 존나 셌다.
"근데 선재야, 일단 나 좀 놓아줄래……"
"헉, 선배 괜찮아요?"
"하아, 이제 살겠다."
"죄송해요, 바보 같은 짓이나 하고."
"알면 됐어."
"선배 미워잉."
"아, 귀여워. 네가 그런다고 내가 너 연락 안 한 거 그냥 넘어갈 것 같아?"
"……제가 뽀뽀하면 넘어가 줄 거예요?"
김강휘는 그 소리에 자신이 먼저 류선재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류선재는 아까보다는 약하게 김강휘를 끌어안았다. 둘은 한참을 쪽쪽 대다가 마주 보고 누워선 서로의 팔을 만지작거렸다. 류선재나 김강휘나 아쉬움이 덕지덕지 붙은 손길로 서로를 쓰다듬고 있었지만, 김강휘에겐 아직 류선재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많았지만, 이젠 정말 자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너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
"규언 쌤한테 종일 빌었어요."
"규언 쌤 엄청 곤란했겠다."
"내일 비타오백 사 들고 가려고요."
"선물 같은 거 안 되지 않아?"
"그럼 체육관 창고 청소할까요?"
"그거 좋다."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는 사이 아까의 입맞춤에 살짝 긴장했던 몸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김강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뜨고 있을 땐 엉성하게나마 이어지던 생각이 눈을 감으면 뚝 끊겼다. 그리고 그건 류선재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갈수록 대화가 끊기는 시간이 길어졌다.
문득 김강휘는 잊어버렸던 꿈의 결말을 알 것만 같았다. 꿈에서 김강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강휘는 그의 조건 없는 사랑으로 더 이상 자신의 조각을 미워하지 않게 됐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조각낼 이유가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됐을 것이다. 사랑이란 타인을 조각내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해주는 것이었으니까. 김강휘가 숨기고 싶어 했던 조각으로 이루어진 류선재를, 김강휘가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처럼…….
김강휘는 품에서 입을 벌린 채 잠든 류선재를 보다가 그의 머리칼에 고개를 파묻었다. 좋은 냄새가 났다.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김강휘는 류선재에게 잠들기 전 마지막 인사를 했다.
"선재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