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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커플 테라피

W. 😇

 * - *

 류선재는 눈을 떴다.

 

 방안이 온통 새하얬다. 꽤 넓어보이는 방을 둘러보자 큰 화면이 보였다. 눈을 위로 올리자 유치한 현수막도 붙어있었다. 천장 어디에도 걸 데가 없어 보였는데 붙어있어 마치 허공에 떠있는 것 같았다.

 

 ~ 두근두근 연애 해결사! 커플 테라피 ~

 '우리 학교 숙소는 아니네.' 류선재는 뜬금없어 보이는 표제를 읽으면서도 태연하게 그런 생각이나 했다. 
 

 사고 후 경찰대 입학하고 지금까지도 뭘 해도 의욕이 들지 않았다. 정신이 나름대로 셀프케어 이벤트를 시작했는지도 모르지.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비현실적인 미남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

 - 두근두근 연애 해결사, 커플 테라피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이 행사는 외압, 강매에 의해 진행...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진행이 시작됐다. 
 어쩐지 피가 빨리 도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

 "저보다 먼저 여기 계셨던 거예요?"

 "..."


 ...


 남자는 할 말이 없었다. 이 상황이 이해가 안되는건 둘째치고, 입만 열면 제발 볼 한번만 만져봐도 될까 하는 간청이 나올까봐 입을 열지 못했다. 어제는 오랜만에 정시퇴근한 선재와 함께 부추를 가득 넣은 한방 오리 백숙도 먹고, 멍멍이 산책도 하고 그짓도 왕창 하고 잤는데(거의 기절이었지만), 이게 조금 특이한 꿈이라는 단순한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눈앞의 류선재는 눈 위에 흉터가 있는 점은 같았지만 지금보다 훨씬 어려보였고 젖살도 조금 남아있었다. 몇 살일까. 남의 얼굴을 이상할 정도로 오래 쳐다보고있다는 자각을 했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말랑말랑.. 


 <우리 취향 제법 잘 맞아요>

 "너무 과묵하시네."

 류선재는 대답이 없는 남자에게 꿋꿋하게 말을 걸었다. 남자는 여전히 말없이 류선재를 빤히 쳐다봤다.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 밑으로 흉터가 보였다. 화상흉터 같았는데, 무서울 정도로 잘생긴 얼굴때문에 흉터는 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 ...총 3개의 방으로 이루어져있으며 난이도는 초급입니다. 알콩달콩한 연인들에게 어렵지 않은 미션으로 구성되어있지만, 빠른 탈출 후 불타는 커플의 뜨거운 밤♥을 위해 패널티 없는...

 미남이 갑자기 화면을 후려쳤다. 류선재는 대답을 기다리다가 슬슬 이게 사람이 아니라 조각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던 때라 남자의 움직임이 반가웠다. 비록 비언어적 의사소통이긴 하지만.

 "이게 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저 스물 두살인데.."

 말도 하네. 류선재는 본인이 어려보이는 타입인가 잠깐 고민했다. 아니 그것보다 지금 태클을 걸 데가 그 부분이 아닐텐데? 이 사람이 움직이고 말도 한다는 충격이 너무 커서 방송 내용을 잊어버릴 뻔 했다. 
솔직히 태클을 걸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연애 해결사? 커플 테라피? 커플도 아니고 애초에 이 사람과는 오늘 처음 본 사이란 말이다. 
류선재는 지금까지 여자랑만 사귀어 봤고, 같은 성별에게 거부감이 있다기 보다는 그쪽으로 생각해 본적이 별로 없었다. 아니, 저 정도로 생기면 성별이 중요하진 않지.. 않은게 아니지. 류선재는 본인의 성 정체성을 새삼 의심했다. 

 물어보고 싶은게 많았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온 질문들을 가까스로 삼키자 옆에서 남자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물 두 살.

 - 네, [패널티 있음] 선택하셨습니다. 초급은 전 연령가로 패널티가 있어도 충분히 클리어가 가능합니다. 
첫번째 방은 '우리 취향 제법 잘 맞아요'! 
화면에 두가지 제시어가 보이면 둘중 더 선호하시는걸 동시에 외치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이구동성이죠.

 "전개가 너무 빠르지 않아?"

 "그러게요. 근데 저,"

 - 10문제로 구성되어있으며, 틀릴때마다 '사랑의 무게' 패널티를 받습니다. 처음 실패시 30분, 그 후부터 패널티 시간이 두배로 늘어납니다. 게임은 잠시 후 시작됩니다.

 "그,"

 "빨리 하자. 나 이거 잘해."

 잘 하는건 뭔가요.. 류선재는 이게 '잘' 해서 해결되는 게임인가 잠깐 생각했다. 사랑의 무게인지 뭔지 패널티는 아까 남자가 화면을 후려쳐서 버튼이 잘못 눌린 모양이다. 아니 그보다 이대로 시작해도 돼? 남자는 이 상황이 딱히 놀랍지도 당황스럽지도 않아보였다. 류선재만 불만이 많은 상태로 게임은 시작됐다.

 - 첫번째 문제입니다. 크림 파스타 vs 토마토 파스타, 3, 2, 1 !

 "벌써.. 토마토 파스타."

 "토마토 파스타"

 시작이 좋았다. 우연인가?

 "오, 토마토 파스타 좋아하세요?"

 "그냥 그럭저럭? 그쪽은 좋아해요?"

 "사실 저는 밥이 더 좋아요. 그런데 크림은 조금 느끼해서..."

 "그렇겠지."

 "그럼 그쪽은,"

 류선재는 대화를 이어보려 했지만 계속되는 문제가 말을 끊었다.

 - 정답입니다. 시작이 순조로운데요. 바로 두번째 문제 갑니다. 라떼 vs 아메리카노....

 ...

 라떼, 고구마케이크, 아웃도어,, 중간에 강아지, 고양이에서 남자가 멈칫했지만 한번도 틀리지 않고 일곱번째 문제까지 도달했다. 남자의 말이 맞았다. 그는 이 게임을 '잘'했다. 수월하게 풀려가는 문제와 다르게 류선재는 슬슬 신경질이 났다.

 '아니, 무슨 커플 미션이라면서 대화할 시간도 안 줘?'

 의문을 갖자면 왜 둘이 커플이어야 하냐를 먼저 따져야 했지만 이미 답답한 류선재의 머릿속에 그런건 없었다. 아니 사람이 대화를 해야 할 것 아닌가. 틀리면 패널티 시간이 30분이라고 했었나? 그럼 그동안은 대화를 할 수 있겠지. 설마 벌칙을 줄 때 까지 뭘 진행하진 않을테니까. 생각은 자꾸만 저 멀리로 흘러갔고 사회자는 류선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 이렇게 취향이 같을 수가 있다니 놀랍습니다. 이제 세문제 남았네요. 닭다리살 vs 닭가슴살!

 "닭..다리살."
"닭가슴살."

 놀란 남자가 돌아봤다. 그렇잖아도 큰 눈인데 더 커진 눈이 류선재를 향했다. 틀릴거라는 생각을 전혀 안한 모양이었다. 혹시 류선재의 대답 타이밍에 맞춰 말을 따라한 걸까? 그렇다면 이 게임을 '잘' 한다는게 이해가 됐다. 
그러나 류선재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틀려볼까 하던 참이라 대답을 시원찮게 해버렸고, 그탓에 찔려서 남자의 눈길을 피했다. 그래도 드디어 할 수 있겠네. 대화...

 게임을 '잘'하는 남자는 아까부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냐면, 류선재는 원래 말도 별로 없으면서 초면일 자신에게 말을 꽤 잘 거는게 귀엽단 생각이나 하고있었다. 물론 숨쉬듯 애교떠는 현 마누라에 비해서는 과묵했지만, 스물 두 살 류선재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해서 초면일텐데도 그랬다. 
게다가 어디서 나오는건지 알 수 없는 방송에서조차 커플 테라피니 뭐니 현실성도 진지함도 없는 주제를 줄줄 말해서 위기감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류선재 볼이나 보기 바빴지..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게임도 이구동성이란다. 이건 마누라와 동거한지 근 일년이 넘어가는 그에겐 식은죽먹기보다 쉬운 문제다. 그가 류선재 취향으로만 대답하면 자다가도 클리어 할 수 있단 소리다. 

 그런데 닭가슴살?

 "이새끼가 닭다리살 싫어한다더니..."

 "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류선재가 되물었지만 곧 진행되는 내용에 답을 듣지 못했다.

 - 처음으로 실패하셨네요. 잘 맞는 커플이라도 모든게 맞을수는 없는 법이죠. 

 "헉, 뭐야."

 "윽,"

 예고도 없이 갑자기 몸이 무겁게 눌렸고 상체가 자연스레 앞으로 숙여졌다. 남자는 순간적으로 휘청였다. 분명 등 위에 아무것도 없는게 분명한데도 마치 성인 남성을 업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패널티구나.

 그는 그렇잖아도 시원찮은 다리에 하중이 걸리자 서있는 것도 부담이 됐다. 옆을 보자 류선재도 별다를건 없는지 약간 어정쩡한 자세였지만 이내 적응하고 바로 섰다.

 - '사랑의 무게', 사랑하는 연인을 업은 느낌이 어떠신가요? 30분간 버텨주세요! 이후 나머지 문제가 재개됩니다. 


 “ ‘사랑의 무게’ 가 이건가 보네.”

 “로맨틱 하네요.” 

 로맨틱은 개뿔. 이 류선재는 모르겠지만 십년 넘게 전에도 류선재는 그를 업고 넓은 교정을 마라톤 하듯 달린 적이 있었고, 남자는 최근에도 술먹고 쓰러진 류선재를 업고 병원에 갔었다. 둘다 덩치값하느라 빈말로도 가볍다 할 수 있는 무게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뛰지도 않는데 못 버틸 무게는 아니란 소리다.

 아주 먼 기억과 최근의 기억을 동시에 상기하던 남자는 곧 다른 의문을 가졌다.

 '근데 원래 꿈이어도 이렇게 느낌이 생생한가?' 

 "괜찮으세요? 저 무거운데."

 "괜찮아요. 별로 안 무거워. 그쪽은.."

 자연스럽게 남자의 헤이즐넛색 눈동자가 류선재에게 향했다. 어디하나 십년 뒤의 그보다 앳되어 보이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그가 튼튼한걸 알아도 걱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류선재는 무거울텐데도 안색이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았다. 

 "아, 사실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갑자기 시작해서 좀 그렇더라고요."

 "인사?"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류선재는 참 일관적으로 깜찍했다. 집안의 류선재는 깜찍한 소리를 할때면 젖꼭지든 어디든 꼬집을수 있었는데 눈앞의 류선재는 꼬집을수도 깨물수도 없었다. 남자는 류선재의 볼을 향해 올라가려던 손을 체감 300번 째 참았다.

 "네. 제 이름은 선재예요. 류선재."

 "다시 볼 사이도 아닐텐데. 나는 그냥 대충 불러요. 당신보다 나이 훨씬 많아. 아저씨도 좋고 뭐,  편한대로."

 "무슨, 아니 그래도.. 그럼 형이라고 할래요."

 "그래요. 선재씨."

 솔직히 남자는 자기가 먼저 다시 볼 사이가 아니라고 해놓고 스스로의 말에 타격받았다. 물론 깨면 옆자리에 자고있겠지만 그 류선재와 이 류선재는 다르니까.. 
류선재는 표정관리를 하려는건지 안하려는건지 그 표정변화 없는 얼굴에서도 뚱한게 티가 났다. 그의 손이 저절로 올라갔다.

 "어.."

 "..표정 풀으라고."

 꼬집고 싶었는데 겨우 참고 볼을 툭 건드리자 류선재의 표정이 더 이상해졌다.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  

 "..여긴 어쩌다 오신거예요?"

 "이거 꿈 아닌가?"

 "저도 그런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런 특이한 테마 생각해본적은 없는데.. 솔직히 형이랑 이렇게 대화하고 있는 것도 신기하죠. 꿈꾸면 자기가 꿈 꾸는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잖아요."

 "나도 신기해."

 "형은 하나도 안 신기해 보여요."

 "그런가? 아닌데."

 류선재는 그가 지금 자기 얼굴을 얼마나 신기하게 보는 줄도 모르고 저런 소리를 했다.

 "커플 테라피라고 하면서 둘 다 남자인 것도 신기하지 않아요?"

 ".....뭐, 꿈이니까요."

 "아니, 이상한 건 아닌데, 지금까지 여친만 있었는데 형이 나오니까, 또 이건 제 꿈인데 그러면 제가 평소에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는.."

 "..지금은 여자친구 없어요?"

 남자는 류선재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사고 후 류선재의 10년을 모른다. 간혹 찾아갔지만 몇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했고 여자친구 여부까지는 알수도 없었다. 그 때의 그라면 두려워서 알고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경찰대면 남자가 대부분에 여자는 거의 없을텐데 없을수도 있지 않나? 
 거의 빌고있는 남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류선재가 웃으면서 답했다.

 "하하. 네. 아, 제가 경찰대를 다니거든요. 주변에 여자도 없고 시간도 없어요. 엄청 굴리거든요.... 형은요?"

 "없는데."

 "와, 형 진짜 잘생겼는데, 진짜 없어요? 말도 안된다. 거짓말치는.."

 "여친은 없어요. 마누라가 있지."

 "..."

 아주 귀여운 마누라. 류선재는 아까부터 신기하다고 하더니 또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있을 것 같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가 갑자기 자기가 유부남 취향이었을리가 없다고 하다가 혼자 갖은 재롱을 다 떨었다. 

 '그런데 지금 몇 분 정도 지났는지 모르겠네.'

 남자는 류선재가 혼자 땅을 파고있건 흙을 먹고있던 귀엽다고 할 인물이었지만 슬슬 한계가 오는것을 느꼈다. 예전에는 이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지금은 하중까지 가해져서 다리가 너무 아팠다. 
류선재는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70kg도 넘는 중량이 신경이 아예 안쓰이는 모양새였다. 분명 저 놈 무게나 내 무게나 그게 그거였을텐데, 그새 다리때문에 움직임이 줄어서 근육이 다 빠졌나. 그나마 덜한 오른쪽 다리로 무게중심을 옮겨봤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거 앉아있다고 실패로 처리되진 않겠지.'

 앉았다가 혹시라도 시간이 늘어날까봐 남자가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쯤 기다리던 안내가 나왔다.

 - 네. 수고하셨습니다. 연인의 무게는 어땠나요? 무거웠나요? 
사람마다 사랑의 무게는 달라서 누구에겐 감당할만 하기도 하지만, 유난히 사랑이 버겁고, 무겁고, 힘겨운 사람도 있
죠. 
 남은 두 문제, 마음을 잘 맞춰보세요!


*

 확실히 이 스테이지는 남자에게 유리했다. 아까 닭다리가 고비였을 뿐 남은 두 문제는 문제없이 클리어 했다. 그러나 이젠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남자는 원래도 은근 지는 것을 싫어했는데, 지금은 틀렸다는 사실보다는 패널티의 여파가 너무 컸다. 
돌아가고 나서 집에 있는 류선재와 치킨 먹으면 꼭 닭다리만 왕창 남겨주고 물어봐야겠다. 류선재를 보자 그는 마지막 문제까지 거의 홀린듯 반사적으로 대답해놓고도 아직 정신을 못차린듯했다.

 "꿈이면 좀 고난이도가 나올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시시하네."

 "마누라..."

 "야."

 "헉, 네. 아.. 맞아요. 하긴 이거 제목이 미션 임파서블도 아니고 커플테라피니까요. 정말 연인들 관계 발전을 위한건가봐요."

 "커플테라피.."

 일부러 단답형으로 부르자 류선재는 구박받은 AI로봇마냥 줄줄 아는 내용을 말했다. 남자의 눈이 새삼 천장 쪽에 덩그러니 붙어있는 현수막으로 향했다. 두근두근 커플 테라피.

 '내가 요새 관계에 불만이 있었나..? 그럴리가.'

 "저희 꽤 잘 맞는것 같지 않아요?"

 류선재가 또 애교를 떨었다.

 "나가면.. 아니, 이왕 온거 잘 해봐요. 아까 3단계까지 있다고 했으니까."

 남자는 잘 생각해놨다가 나가면 써먹으라고 하려다가 류선재가 정말 기억하고 연애애 관심을 가질까봐 관뒀다. 

 <밤하늘의 별을 따서 너에게 줄게>

 - 첫번째 방 클리어를 축하드립니다. 잠시 후 방 이동이 있겠습니다.

 두번째 방은 지금보다 조금 더 활동적인데요, '밤하늘의 별★을 따서 너에게 줄게' 입니다. 가만히 서서 별을 딸수는 없겠죠~

 류선재가 이 곳에서 따로 문같은걸 발견한 적이 없다는걸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배경이 바뀌었다. 천장도 벽도 없었고 사방이 트인, 말그대로 별이 가득한 밤 하늘 아래 초록 들판 같은 장소였다.
이 친환경적인 배경과 어울리지 않게 허공 4m부근 떠있는 약간 커다란 인조 별도 보였다. 아마 저 별을 따오라는 거겠지. 

 만난지 얼마 안된, 체감 시간으로는 본 지 두세시간도 되지 않을, 자신과 커플이 된 유부남도 하늘을 올려다 보는게 보였다. 아무말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가 이곳을 맘에 들어 하는게 느껴져 류선재는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 물론 진짜 별을 따는 건 아닙니다. 이 곳엔 조금 특이한 별이 있는데요. 그 별을 가져다 사랑하는 연인의 품에 안겨주는게 이번 미션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주든 상관 없이 클리어됩니다. 화이팅!

 어쩐지 안내 진행조차 류선재에겐 배경음악처럼 들렸다. 이런 이벤트는 나쁘지 않았다.

 "저 위에 가짜 별 말하는 거겠죠? 그런데 정말 여기 자기 맘대로 시작하네."

 "저거 4m는 되나? 내가 꿈 밖에서랑 능력치가 같다면 그만큼을 뛸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남자가 그리 무겁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뛰어서 따오라는 건 아닐거다. 그리고 아까부터 느꼈지만 이 사람은 다리가 조금 불편해보였다. 류선재는 왼쪽 발을 티나지 않게 끌던 남자를 떠올렸다. 첫번째 방의 패널티 때문일까? 정말로 저걸 뛰어서 따오려면 그보다는 자신이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설마요. 뭐 장치같은걸 숨겨둔게 아닐까요?"

 류선재는 말하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이 곳은 공간이 한정된 것도 아니어서 너무 넓었고, 사방에 나무는 커녕 뭘 숨길 벽, 물건 같은것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남자도 같이 살펴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이 주변은 아닌 것 같아요. 시험삼아 조금 더 멀리 갔다오는것도 나쁘진 않은데, 별이 여기 있는데 멀리 가서 찾는 것도 이상해."

 "그렇죠.... 그러면 어떻게.."

 "음.."

 고민해봐도 두사람 다 썩 좋은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1단계 패널티 이후 다리가 영 시원치 않은 남자가 먼저 앉았고, 류선재는 그걸 보고 아예 드러누워버렸다. 
남자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류선재의 짧은 머리에 시선을 뒀다가 하늘을 쳐다봤다.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래도 하늘이 되게 예쁘네요."

 "..요새 이렇게 별 많이 떠있는거 보기 힘들지."

 "맞아요. 어쩐지 공기도 맑은 것 같아요. 형도 시골에서 사시는건 아닌가보네요. 형, 어디 사세요?"

 "시골 안 살고 요새는 시골에서도 이런거 못봐요."

 "그런가요. 형 근데 무슨일 하세요?

 "아까부터 뭘 자꾸 물어봐?"

 류선재는 씨익 웃었다.

 "우리 지금 커플이잖아요."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지금이 커플 테라피 중이라 그런지 눈에 뭐가 씌인건지 류선재 눈에는 그게 귀여워 하는 걸로 보였다. 
류선재는 자신이 꽤 오바한다는걸 알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컨셉에 과몰입 하는게 컨텐츠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꿋꿋이 대답했다.

 "..일 안해요. 착실하게 마누라 내조 하고있지." 

 "오. 사모님 좋으시겠네요.. 가 아니라. 여기서 그런 소리 하시면 안되죠. 커플 컨셉에 맞게 말씀을 하셔야지. 아니면 이제 불륜이 되는.. 악,"

 "진짜 아무말이나 하네..."

 남자는 거침없이 대가리를 갈겼으면서도 류선재가 일부러 과장되게 머리를 감싸자 신경쓰이는지 머리 위 허공에 손을 올려 감싸는듯한 제스춰를 취하곤 곧 내렸다.
아무한테나 이럴까? 저런 얼굴을 가졌는데 마음까지 이렇게 약하면 세상 살기 참 힘들겠다 싶었다.

 "힘이 왜 이렇게 세요. 기억 또 다 날리겠네. 아, 장난이에요. 별로 안아파요. 아, 지금은 아파요."

 "기억..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거 어떻게 할지 생각 해봐. 여기 평생 있을거야?"

 이번에는 등짝을 때리는 남자의 손길을 피하며 류선재는 생각했다. 그러게. 이제 겨우 두번째 방인데 벌써부터 막혀버렸다. 중앙의 별은 인공이라 자연적인 풍경과는 이질적인데다가 쓸데없이 크기가 커서 누워있는 류선재 눈엔 더 잘 띄었다. 
 
진짜 저 별을 따준다고 좋아할까? 하긴 선물은 내용물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저게 진짜 별도 아닌데 말이죠."

 "진짜 별을 따오라고 하면 그게 더 문제지."

 "드라마 보면 보통 이런건 필요없다고, 너만 있으면 된다고 하잖아요."

 "아냐. 요새 드라마는 오히려 넙죽 잘 받아먹는게 인기더라."

 "오. 형 드라마 많이 보시나 본데요. 제말은, 뭐, 별보다는 연인이.. 그러니까.. 니가 내 별이다? 이런거?"

 “뭐?”

 니가 내 별이다. 그냥 되는 대로 꺼낸 말이지만 류선재는 어쩐지 이쪽이 끌리는걸 느꼈다. 이거 설득력 있지 않나? 적어도 허공 몇 미터 위에 있는 별을 따오라는 것 보다는, 옆에 연인이 별이라는 해석이 더 커플 미션적으로 말이 됐다.

 "아니, 그런 말 있잖아요. 어디서 나온 건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갑자기 생각나서요. 아까 설명에도 조금 특이한 별이라고 했지 정확히 저기 저 별이라고는 말 안한것 같아서요."

 "..그래서?"

 남자는 꽤나 껄렁한 투로 말했다. 알아들었으면서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런거죠."

 "설마, 별이니까 안아보자고요?"

 이상한가? 류선재는 잠깐 자아성찰타임을 가졌다. 어디는 인사로도 포옹을 하고, 뽀뽀나 키스까지 하지 않나? 그리고 지금 설정상 이 남자와 자신은 커플이다. 이 정도면 커플테라피 다운 미션이 아닌가. 한번 생각하고나니 이게 맞다는 생각만 들었다. 
물론 아내분께는 죄송하지만 이건 꿈이니까, 회개합니다.

 

 "네. 한번 해봐도 손해는 아니잖아요. 포옹이면 인사랑 다름없죠."

 "...안는게 아니라 상대에게 안겨 주는거라는데."

 "그거나 그거나요."

 남자가 답지않게 머뭇대다가 팔을 살짝 벌렸다. 류선재는 그걸 보고 한 0.01초 끌어안은 뒤에 바로 떨어졌다.

 "윽, 뭐야, 방금 부딪힌거예요?"

 "아니, 연습이었어요. 다시.."

 다시 시도한 류선재는 정말 건전하게 '포옹'을 했다. 만난지 얼마 안된 남자와 포옹... 그는 원래 넉살이 좋은 편이어서 이런 인사에 거리낌을 느끼지 않았다. 물론 아무나 해보라고 하면 안했겠지만.
류선재가 넒게 등을 감싸 안았지만 남자는 반응이 없었다. 왜 이렇게 굳어있지? 류선재가 넓게 등을 감싸고 따라서 하라는듯 손으로 허리께를 툭툭 두드리자 남자는 겨우 따라서 팔을 둘렀는데, 그마저도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서 무슨 솜털을 얹어 놓은 것 같았다. 곧 남자가 어색하게 떨어졌다.

 "...이거 아닌가본데."

 "뭘 했다고? 형이 성의가 없어서 그래요. 제대로 안아야죠."

 "음.."

 

 핀잔을 주자 남자는 다시 살짝 안았다. 아까보다는 힘이 들어갔는데 여전히 행동이 어색했다. 그렇게 안보였는데 생각보다 낯을 가리나보다. 류선재가 가슴이 닿을 만큼 깊게 껴안고 나서야 누가봐도 포옹이다 싶은 자세가 나왔다. 
이정도로 했는데도 통과다 뭐다 하는 말이 나오지 않는걸 보니 이제는 아닌걸 인정해야 했다. 류선재는 어쩐지 놓기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키가 비슷해서 맞춘것처럼 몸이 딱 맞는게 좋았다. 커플 테라피의 효과인가.. 류선재는 마지막으로 세게 힘주어 안았다가 떨어졌다.

 "진짜 아닌가?"

 "발상이 신기하긴 했어. 예전에 여친한테는 이런식으로 작업걸었나봐요?"

 "아니, 그런 적 없는데요? 원래 포옹이 스트레스에도 좋고,"

 남자는 류선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을 돌렸다. 사실 그는 티는 안냈지만 이 상황이 참 힘들었다. 하라면 못할 건 없다. 류선재가 기겁할 만큼 더 해줄 수도 있는데(심적으로는 뽀뽀만 오백번 넘게 했다.) 진짜 그럴 수도 없었고, 안는거 자체는 물론 좋았지만 혹시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까봐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저 자식은 분명 날 기억도 못할텐데 왜 아무 거리낌이 없는 건지. 류선재가 대놓고 피했다면 더 상처받았을거였지만서도 그랬다. 남자는 속으로 툴툴대며 괜히 진행자에게 한마디 했다.

 "거기, 힌트같은거 좀 줘요. 이대론 평생 다음 방 못 가겠어."


 - 네. '니가 내 별이다', 그런 방법을 사용하실줄은 저도 몰랐는데 다음 테라피 구성에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답례로 힌트를 드릴게요! 올해가 계묘년이죠? 둘 시간대랑 현재 세대랑 안맞는다고요? 원래 그런법입니다. 제가 아까 활동적이라고 했던 것과 계묘년의 상징을 잘 기억하면서 풀어보시길 바랄게요!


 초급이라는 타이틀이 폼으로 붙은건 아닌지 진행자는 쉽게 힌트를 내어줬다.

 "진짜로 주네요."

 "그러게. 기대 안했는데. 계묘년이면 검은 토끼.. 활동적.. 결국 뛰라는건가?"

 남자가 단어에서 연상되는 말을 그대로 내뱉자마자 바로 류선재가 제자리에서 풀쩍 뛰었다. 하지만 역시 4m는 어림도 없었고 남자도 안풀리는 다리로 뛰어 봤지만 별다를건 없었다.

 "저게 좀만 더 낮았으면 제가 형을 들면 쉽게 딸수 있는데."

 "아니, 뭐 어떻게 뛰라는거야. 뛰어서 닿을 곳에 둬야지."

 그가 불평하는 사이 류선재는 토끼뜀인가 하면서 귀를 잡고 앉아서도 뛰고 서서도 뛰고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뛰는건 아니었으면 했는데. 남자는 무슨 변화가 있나 유심히 보다가 따라서 한번 살짝 뛰었다.

 "어?"

 "음?"

 둘에게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나왔다. 뜀을 뛴 뒤 딛는 땅이 높아진 느낌이었다. 시선을 발밑으로 두자 땅은 그대로고 대신 발이 닿아있는곳만 불투명한 계단이 생겨있었다. 두 사람 모두 한 계단 씩 올라 온 셈이었다.

 "이거 둘 다 뛰어야 되는건가요?"

 "잠깐만, 다시."

 류선재가 뛰고 나서 타이밍을 살짝 놓친 남자가 늦게 뛰자 류선재의 발판이 사라졌고 이어서 남자의 발판도 사라져버렸다. 
겨우 계단 한 개 높이였지만 류선재도 중심을 못잡고 엉덩방아를 찧었고, 역시 허무하게 떨어진 남자는 살짝 삐끗한 발목을 잡고 작게 욕을 짓씹었다.

 "아이고.. 이거 동시에 뛰어야 되나봐요."

 "..그러게요. 다시 해보자."

 

 류선재가 주는 신호에 맞춰 다시 둘이 동시에 뛰자 계단 한칸 높이만큼 올라올 수 있었다. 생각보다 방법이 어렵지는 않다. 4m면 천장이 높은 2층정도다. 하긴 분명 초급이라 했었으니까.
앉아서 뛰는 것도 아니고 서서 뜀뛰기니까 금방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썩 표정이 좋지 못했다. 좀 전 계단이 없어질 때 디뎌 삐끗한 다리가 하필 왼발이었다. 계단 높이가 한 20센티 안되는 것 같았는데, 그러면 최소 20번 가량 지금 이 다리로 뛸 수 있을까? 
꿈이니까 의지로는 분명 가능해야 하는데 이 꿈은 자꾸 현실 몸상태를 반영하는 느낌이 들었다.

 

 "저랑 천천히 뛰어요. 제가 숫자 셀게요."

 하나,

 둘,

 셋,

 그는 꽤 잘 참았다. 땀이 비오듯 흘렀다. 단 세번의 뜀으로 거친 숨소리를 참을 수 없었고, 다섯 번째 계단부터는 류선재와 같이 세던 구령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남자가 힘들어하는 걸 눈치 챈 류선재가 쉬었다가 하자고 했지만 대충 손을 휘둘러 그 또한 거절했다. 말을 할 기운도 없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열 번째 까지만 가서 쉬자.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여섯번 째, 일곱번 째 계단을 뛰었다. 하지만 여덟번 째에서 다리에 힘을 줘도 도저히 왼쪽 다리가 계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윽,”

 혼자 뛰게 된 류선재가 땅으로 추락하는게 보였다. 

 "선재야!"

 남자가 다급하게 불렀다. 
추락은 짧았다. 애초에 여덟 계단이면 사람 키 높이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나 잘못 떨어지면 발목 정도는 삐끗할 높이이기도 했다.

 류선재는 그 짧은 시간안에 어떻게 한건지 낙법을 써서 안전하게 착지했다. 


 - 위험해요! 일정 높이 이상 부터는 안전장치가 작동됩니다. 하지만 조심하세요! [패널티 있음] 선택으로 손잡이, 난간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제 이 방을 이해하셨나요? 계단바닥에서 발이 떨어지는 순간, 자신이 딛고있던 바닥은 사라집니다. 
이때 상대가 바닥에서 발을 뗀 상태가 아니라면 새로운 계단이 생기지 않아요. 
내 발이 떨어지면 내 계단이 사라지고, 대신에 상대 계단은 생성되는 그야말로 커플협동적인 활동입니다. 동시에 상대의 발이 떨어진다면 내 계단이 생기겠죠? 

 

 "너 괜찮아?"

 "네. 어짜피 별로 높지도 않았어요... 죄송해요, 다리가 불편한 건 알았는데, 제가 멈췄어야 했어요."

 

 류선재의 목소리가 시무룩했다. 애초에 먼저 쉬자고 제안했던건 그였다. 남자가 거절한거다. 지금 류선재가 잘못한 것이 전혀 없었음에도 류선재는 사과의 말을 먼저 입에 올렸다.
남자는 초조해졌다. 아직도 그는 류선재보다 일미터 넘게 높은 곳에 있었고 이 방법을 세번 정도만 더 반복한다면 이 방은 클리어다.

 올려다보는 류선재의 눈에 별이 비춰 까맣게 반짝였다. 원망이라곤 한톨도 없었다.
남자는 그 눈을 보면서 빨리 별이든 뭐든 따다 안겨주고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문제는 이 다리로는 나뭇잎도 못 딴다는 것이다.

 "..선재씨는 한칸 뛸때마다 다시 땅으로 내려가요. 내가… 한번에 뛸 순 없는데, 천천히 하면 될 것 같아."

"아뇨. 선배, 아니, 형. 형이 내려오세요. 제가 잡아줄게요."

 선배?

 "뭐? 왜 내가 내려가?"

 그는 그렇게 말해놓고도 아마 실수로 나온것임이 분명한 선배라는 말에 정신이 팔려 발을 뗐다. 
1.5미터 가량의 높이라 그냥 혼자 뛰어도 크게 다칠리 없는데, 류선재는 34살이나 먹은 그가 열살짜리 애로 보이는건지 굳이 안아서 받아줬다.   

 "읏차, 그렇게 뛰면 다칩니다."

 "당신이 올라가도 어짜피 계속 뛰는건 똑같아. 차라리 내가.."

 "알아요. 하지만 이렇게 하면 돼요."

 류선재가 등을 보이고 쪼그려 앉았다. 남자가 움직이지 않자 살짝 한숨을 쉬더니 일어나 직접 손을 끌어당겨 업었다. 그는 쉽게 업혀주지 않았지만 류선재가 일부러 끙 하는 소리를 내가 움직임을 멈추고 얌전히 업혔다.

 

 "..업고 뛰겠다고?"

 "네. 이거 어쨌든 상대방 다리가 땅에 붙어있지만 않으면 제 계단은 계속 생기는 거잖아요."

 

 동시에 뛰어야만 새 계단이 생기는거라면, 애초에 한사람이 계속 떠 있으면 된다. 그건 남자도 류선재가 업히라는 시늉을 할때부터 눈치챘다. 
하지만 자신이 가벼운 무게도 아니고, 업은 상태로는 평지를 뛰어도 힘든데 계단을.. 

 

 "알아. 그래도 업고 뛰는건 무리야....무릎 망가져... 그냥 천천히 해요."

 "형, 이거 꿈이잖아요."

 

 류선재가 살짝 웃었다. 남자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러면 쉬면서 해요."

 "알겠어요."

 "한번에 올라가려고 하지 말고."

 "네."

 "..힘들면 바로 말하고."

 "하하, 자꾸 그렇게 말하시면 힘들어가서 무거워지는데."

 "..."

 그가 입을 다물자 바로 시작한 류선재는 진짜 토끼라도 된 것마냥 잘도 뛰었다. 심지어 땀도 별로 안나는 것 같았다. 
십년 전엔 깜냥이였는데, 지금은 깜장 토끼.. 깜토. 짧은 머리통을 쓱쓱 한번 쓰다듬자 류선재는 뛰려고 살짝 무릎을 굽힌 상태 그대로 굳었다. 힘들긴 했는지 등 너머로 심장 뛰는 박동이 크게 느껴졌다. 

 "아니, 진짜 잘 뛰네."

 "하.."

 "쉬면서 하라니까."

 류선재가 허리를 펴고 숨을 골랐다. 느껴지는 체온을 애써 무시하며 별만 보고 뛰었더니 벌써 이만큼이나 왔다. 

 "그래도 반 넘게 온것 같아요."

 여기서 떨어지면 다리 하나는 부러질 수도 있겠는데. 계단이래봤자 그냥 불투명한 판때기 느낌이라 사실 허공에 서있는 느낌이 강했다. 
류선재는 바닥을 보면서 만약 떨어진다면 등 뒤의 연인을 어떻게 보호해야할 지 시뮬을 잠깐 돌렸다. 남자도 따라서 시선을 내렸다. 업힌 내내 류선재의 동그란 머리통을 보거나 혹시 무리하고 있진 않은지 상태를 살피느라 바닥을 보는건 처음이었다.  

 "세 칸 뛸 때 마다 쉬어요."

 "꽉 좀 붙잡아요. 떨어지겠네."

 아까 일정 높이 이상부터는 안전장치가 있다고 했으니 꿈인걸 차치하고서라도 다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남자는 떨어진다면 재빨리 본인이 밑에 깔릴 생각을 했다. 

 문제는 떨어지면 다시 올라와야 된다는 것이다. 류선재를 지금보다 더 고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가 목을 꽉 끌어안자 류선재는 한번도 쉬지않고 끝까지 올라갔다. 
목표가 눈앞이었다. 눈이 부시진 않을 정도의 광원이 보였다.

 "이걸 별이라고 불러도 돼? 별 모형 아냐."

 "그래도 잘 만들었네요. 엄청 큰 무드등 느낌..?"

 류선재는 남자를 업은 상태에서 한 손을 떼서 만지려고 했다. 남자는 황급히 그를 말렸다. 

 "내가 잡을게. 잠깐만.... 지금 바닥에 닿아도 되나? 여기. 이거 들어봐."

 "네. 따뜻하네요 이거... 으악!"

 "!"

 남자가 그에게 별을 안겨주자마자 계단이 사라졌다. 낙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풍선같은 푹신한게 닿았다 싶더니 어느새 둘은 들판에 바른 자세로 서있었다. 
류선재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남자를 바라봤고 그도 별다를 건 없는지 비슷하게 류선재를 쳐다봤다. 

 - 축하합니다. 두 번째 방도 클리어 하셨습니다. 
 상대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연인이 대신 끌어주고, 그를 온전히 믿어주는 것도 건강한 관계에 도움이 되겠죠? 

마지막 방만 남았네요. 곧 이동됩니다.

 "고생에 비해 되게 싱겁게 끝났는데요."

 류선재의 말에 허탈한 속내가 그대로 드러났다. 남자는 한결같이 귀엽게 쳐다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러게. 너 손에 뭐 있다."

 "어... 별?"

 어느새 류선재는 아까에 비해선 아주 작은, 그러니까 그 자신의 엄지손톱만한 별을 손바닥에 들고 있었다. 진행자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 기념품입니다. 아까 별은 큰 버전이고, 이건 미니어처예요. 큰건 아무래도 휴대가 불편하니까요. 두사람의 기억이니 간직해두시면 좋을것 같아 특별히 준비했답니다.

 "좋네. 꿈 깨면 집에 들고가."

 "네. 가보로 간직할게요."

 이제 류선재는 태클 걸 생각도 안들었다. 그래서 그냥 착하게 대답했다.


 <당신의 모든 점을 사랑해>


 아까 의식할 새도 없이 배경이 흰 방에서 밤하늘 아래 들판으로 바뀌었던것 처럼, 두 사람이 눈 감았다 뜨는 새에 다시 공간이 바뀌었다.
이번엔 뭐라해야 되나, 원룸 느낌? 류선재가 자취하던 원룸이나 남자가 지금 살고있는 집의 방 한개정도 크기였는데, 침대도 있어서 더 가정집 방 느낌이었다.

 "침대는 뭘까요..."

 "그러게. 당신 뛰느라 힘들었잖아. 누워서 좀 자던가."

 꿈인데 또 자요? 류선재는 말하려다가 그만 뒀다. 꿈이 아니면 설명이 안된다는 걸 알았지만 첫번째 방에서도 그랬고, 두번째 방 부터는 정말 꿈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까 뛰던 여파로 아직까지도 허벅지가 펌핑돼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혹시 여기서 잠이 들어서, 잠이 깨고, 남
자가 없어진다면...

 - 세번째 방에 오셨네요! 이 방이 마지막입니다. 이 방이 어떤 커플에게는 가장 간단할 수도 있겠는데요, '당신의 모든 점을 사랑해'! 
 연인의 모든 점을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여기서 의미하는 점은 그 점이 아니라, 몸에 있는 점, 까만 점입니다! 두 분 몸에 있는 모든 점을 세서 저한테 말씀해주시면 이 방은 클리어 됩니다. 아주 쉽죠?

 "점이요."

 뭔가 김빠지는 주제였다. 그전까지도 딱히 거창할 건 없었지만.

 "..이거 본인이 세도 되는거 아냐?"

 "안 될건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형 등은 본인이 모르잖아요."

 "그럼 거울 같은 거 없나 찾아볼게요."

 남자가 부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류선재는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앞으로 가서 섰다.

 "딱 봐도 없는데?"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저기 서랍 한번.."

 "됐어요. 제가 세면 되죠. 목욕탕 오셨다고 생각 하세요."

 류선재는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 남자는 이내 어떻게든 혼자서 점을 세 보려던 시도를 그만뒀다. 

 사실 그가 이렇게까지 빼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본인 몸을 드러내는데에 그렇게 거부감이 있는 편도, 수치심을 느끼는 편도 아니었지만 어제는 류선재와... 약간 격렬한, 아니, 많이 격렬한 밤을 보냈기 때문에 지금 이 류선재 앞에서 옷을 벗는게 좀 꺼려졌다. 

 "그럼 당신부터 해. 내가 세줄게."

 "뭐, 그래요."

 류선재는 아무래도 그가 부끄럼을 탄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어이가 없었으나 따지자면 아예 틀린것도 아니었다. 부끄러움 보다는 민망함 쪽이라고 해야하나. 류선재는 정말로 목욕탕이라도 온 것 처럼 훌훌 옷을 벗었다. 
솔직히 류선재 몸에 있는 점은 이미 남자가 다 알고 있을 거였다. 그는 류선재가 옷을 벗지 않아도 반 정도는 당장 짚을 수 있었다.

 "좀 가까이서 봐도 되나? 눈이 나빠서."

 "네. 근데 저 점 별로 없어요. 다섯개.. 많아봤자 열 개 안 될걸요?"

 "아니야."

 "네?"

 "아니,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른다고."

 보통 사람들이 점을 몇 개 갖고있는지도 몰라서 비교할 순 없지만 남자가 알기로 류선재는 점이 많은편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열개 다섯개도 안되고 그런 정도로 없는건 아니었다. 
그는 점을 세야 한다는 핑계로 몸을 감상하며 눈요기나 실컷 했다. 얼굴은 10년 후에 비해 젖살이 남아있었는데 몸은 아니었다. 물론 집에 있는 류선재가 조금 더 덩치가 큰 것 같기는 한데, 눈앞의 류선재도 무슨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스물 두 살 몸이 이래도 되나?

 "너 머리카락 속에도 점 있더라."

 "오, 어떻게 아셨어요."

 "아까 업혔을때 봤어."

 거짓말이다. 원래 알았다.

 "여기도 있고. 이건 알지?"

 "네. 헉, 왜 이렇게 세게 누르세요."

 오른쪽 유륜 밑에 크지 않은 점이 있었는데 남자는 사심을 담아 그걸 꾹 눌렀다. 사실 어제도 여길 깨물었는데. 류선재는 무슨 추행을 당한 것 처럼(맞지만)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여기, 여기, 여기, 앞판에 별로 없네. 뒤로 돌아봐."

 "앞판이라니까 이상하네요."

 남자는 점이 있는 자리를 하나하나 짚었다. 어디있는지 찾는게 아니라 이미 아는 위치를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류선재는 순순히 뒤로 돌았다.

 "여기. 목에도... 어, 없네."

 "목에요?"

 "아니, 잘못봤나봐요. 먼지였나."

 하도 거침없이 짚어서 누가보면 자기 몸인줄 알겠다. 그는 자신있게 엉뚱한 곳을 짚어놓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점을 찾았다. 정말 열 개 넘었네. 
아까 가슴에 있는 점을 세게 찔렀다고 류선재가 뭐라 한 뒤로 그는 살짝만 눌렀는데 그게 기분이 참 이상했다. 가까이서 보느라 그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도 가끔 몸에 스쳤다. 지금은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닌데 몸이 자꾸 다른 자극으로 받아들여 류선재는 아무말이나 막 던졌다.

 "점이 크면서 생기기도 한대요. 커지기도 하고."

 "맞아. 너 목에 그거.. 아니, 나도 생긴거 있어. 그런데 있던게 없어지진 않더라고."

 어쩐지 남자의 말이 따뜻하게 들렸다. 원래도 얼굴만큼 좋은 목소리였지만 조심스러운 손길이 더해지니까 진짜 연인이라도 대하는 것 같았다.

 "신기하네요.. 저 이제 다 된건가요?"

 "응. 열 여덟개?"

 "이제 형 벗을 차례에요."

 "..."

 이제 미룰 수도 없다. 남자가 몰래 한숨을 쉬었다. 결혼했다고 했으니까, 그냥 격한 마누라가 있나 보다 하겠지. 류선재는 무슨 이게 3초면 사라지는 스피드퀴즈 힌트인것 마냥 아직 웃옷을 벗기도 전인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점은 몇초 지난다고 안사라지는데.. 

 남자는 천천히 웃옷 셔츠부터 탈의를 시작했다.

 "헉.."

 "...마누라가 힘이 좀 세서."

 남자가 눈길을 피했다. 팔짱을 끼고 옷벗는 것을 감상하던 류선재의 눈초리가 대번에 뾰족해졌다. 깎아놓은 조각같은 몸에 알록달록 화려하게도 물이 들어있었다. 이래서 그렇게 안 벗으려고 했구나. 잘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가정폭력의 현장, 맞고 사는 건가? 싶었을거다. 
하지만 류선재는 모텔만 백번도 넘게 들락날락거리던 놈이었고, 저게 맞아서 생긴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지금 남의 집 남편을 데려다 외간남자와 커플 테라피 같은 것을 진행한다는걸 그분은 아실까?

 "누우세요."

 "뭐?"

 "잘 안보여요. 누우세요."

 "그냥 가까이서 보면 되잖아요."

 "키스마크랑 잇자국에 가려져서 잘 안보인다고요. 누우세요."

 "..."

 잇자국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발음때문인지 거의 이를 악문것 같이 들렸다. 남자는 그냥 입을 다물고 누웠다. 여기 천장은 무늬도 없네...

 "쇄골 쪽에 점 있어요. 여기 물리면 안 아파요? 이런델 다 무셨네."

 "..안 아파요."

 "가슴엔 왜 이렇게.. 여긴 점도 없네.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아주 물어 뜯었는데?"

 "아니, 큭, 간지러워,"

 류선재는 잘 걸렸다는 듯 본격적으로 탐색을 시작했다. 어찌나 가까이서 보는지 거의 숨이 느껴질 정도였다. 위에서부터 손가락을 떼지않고 훑어 내려오는데, 남자는 간지러워서 소름이 다 돋았다. 

 "팔 잠깐만 들어봐요.. 옆구리 위쪽에 있네요."

 "윽, 아니, 손으로 누르지 마요. 하하.. 아, 진짜 간지럽다고."

 "왜 이렇게 간지럼을 잘 타요? 배꼽 옆에도 있어요."

 "자꾸, 으.."

 이 사람은 배꼽도 예쁘네.. 남자는 많이 간지러웠는지 결국 양손으로 배꼽을 가렸다. 사실 류선재는 점 아닌 곳도 짚고 있었다. 정확히는 잇자국이나 키스마크가 있는 곳이었다. 그는 원래도 간지럼을 엄청 잘 타는 타입인 것 같았으나, 점이 있는 곳을 건드릴때보다 자국이 남은 곳을 건드릴때가 훨씬 반응이 격했다. 
짚을때마다 움찔대는데.. 성감대인가. 하긴 부인 분이 아니까 그곳을 물고 빨았겠지. 남의 집 금슬이 이렇게 좋다는걸 내가 알아야 하나? 지금은 자신이랑 커플인데 말이다. 심술이 나서 일부러 더 건드린 것도 있다.

 '그런데 힘이 정말 많이 세신가보다.'

 웬만한 여자 악력으로는 이렇게 손가락 자국이 그대로 남기 쉽지 않다. 류선재는 그가 진정하길 잠깐 기다렸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선명한 손자국이 남은 상체를 지나 다리로 내려가자 비교적 여러가지 자국은 덜했으나 아주 커다란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상체도 자국에 덮여서 그렇지 흉터가 엄청 많긴 했다.

 "크게 다친적 있으신가봐요."

 "그냥, 실수로 떨어진 적이 있어요."

 "..."

 떨어졌다고.. 혹시 실례가 될까봐 더는 묻지 못했다. 양쪽 다리 전부 크게 수술자국과 흉터가 있었고, 이 정도로 흉터가 많으면 거의 살아있는게 다행일 정도로 큰 사고 같았다. 그래서 다리가 불편해 보인거구나. 두번째 방에서 계속 원래대로 뛰었다면 큰일 날 뻔 했다.

 "다리에는 점이 거의 없네요... 허벅지에 하나, 어?"

 "왜."

 "아뇨..."

 이거 설마 덫 자국인가? 사람 발목에 이런게 걸릴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물어보고싶은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류선재의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는 왠지 보는것만으로도 자꾸 화가 나고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입을 열 생각도 못 했다. 답답했다. 자신이 있었다면 절대 이렇게 다치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나갔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애초에 그런 위험한 곳으로 갈수 없게 단속이라도 잘 해야.. 

 "내가 좀 덤벙거려."

 "그런것 같아요.."

 "뭐?"

 "아니에요. 뒤로 도세요."

 그는 궁시렁거리면서 돌아누웠다. 등이라고 상황이 다를 건 없었고 앞판이랑 똑같이 색도 모양도 알록달록 화려했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 등 뒤를 보면서 할 수 있는 체위가 따로 있나..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지 얼굴도 모르는 분에게 실례인것 같았다.

 "날개뼈 쪽에 있어요."

 "음."

 "등 쪽에는 별로 없네요.."

 "좋네. 셀거 별로 없어서."

 "아뇨.. 등허리 쪽에도 하나. 아니,"

 "왜, 또."

 미친…

 류선재는 아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이제야 알았다. 뒷허리부터 골반쪽을 감싼 손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씨발, 100미터 밖에서 봐도 이건 잡고 박은거다. 가슴을 볼 때부터 계속 이상했는데 악력은 그렇다 치고 손 크기부터가 류선재 급이었다. 

 여친은 없는게 맞네. 남자니까. 여자만 사귀었던 류선재의 커플로 남자가 배정된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문제는 이쪽에 있었던 것이다.

 "마누라라고 하신게 남자마누라 라는 뜻이었나봐요."

 "..뭐?"

 결국 류선재는 입 단속에 실패했다. 따지고 보면 거짓말도 아니긴 하다, 하지만 누가 이런 남자를 대체, ...남자끼리 만나는게 죄도 아니잖아. 아까까지만 해도 이 남자만큼 생겼으면 성별이 중요하진 않을 거라고 하던 건 본인 아니었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자꾸 어딘지 모르게 열이 올라서 이게 속았다는 배신감인지 화인지도 분간이 안갔다. 납득을 하려고 스스로 노력을 해봤지만 곧 뒤따르는 다른 생각이 이를 방해했다. 

 류선재는 상상력이 꽤 좋은 편이었고, 시선의 끝엔 여전히 손자국이 있었다. 가슴에도 아프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자국이 선명했는데, 한손으로는 여길 잡고 한손으로는 가슴을 세게 주물.. 

 세게 때려야 될건 류선재의 정신상태다. 류선재는 곧 정신을 차렸다.

 "죄송해요. 손이 큰 것 같아서 그랬어요.. 제가 실례했어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

 평상시라면 몇 마디라도 더 해줬을 남자는 조용했다. 사실 그는 남자 마누라란 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그랬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 발가락이 자꾸 곱았고 류선재가 뭘 하는지 의식하게 됐다. 분위기가 대체 왜 이런거지, 앞을 보고있는게 아니라 다행이다.. 하지만 지금 보고있는게 류선재인데 어떡하란 말인가. 씨발 진짜 그게 너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냥 팔을 들어서 얼굴이나 묻었다.

 "..마저 세기나 해요."

 "네.."

 류선재는 진짜 미안하기라도 한 건지 말도 걸지 않고 셌다. 가끔 점이 맞나 확인하려는건지 조심스럽게 짚어보기도 했는데, 남자는 최대한 딴 생각을 하면서 참았다. 돌아 누워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끝이에요?"

 "네. 선배, 아니. 형도 별로 없어요. 스무개예요."

 "..둘이 갯수 합치는 거였나?"

 "그런 말은 없었는데. 다 말해보죠, 뭐. 이제 일어나셔도 괜찮아요."

 "..좀만 더 누워있을게요."

 "그러세요."

 남자가 안정을 찾는 사이 류선재는 그의 점 갯수인 20도 불러보고 자신의 점 갯수인 18도 불러보고 둘을 합친 숫자인 38도 불러봤다. 
확실히 난이도는 지금까지 한 것 중에 제일 쉽다고 할 수 있었는데, 정신적 피로도는 이게 제일 컸다. 이래서 마지막 방인건가 싶었다. 차라리 몸 쓰는게 나을 것 같았다. 
 
몸을 써..? 류선재는 잠깐만 신경줄을 놓으면 주체가 안되는 자신의 정신머리를 원망했다.

 - 네, 마지막 방도 끝났습니다. 수월하게 맞추셨네요. 역시 커플은 몸이 가까워져아 마음도 가까워지는 법이랍니다. 아쉽진 않으신가요? 시원섭섭한가요? 그저 빨리 나가고 싶으신가요? 커플테라피가 그리워지실 날이 올거예요~ 


 어떻게 잊어요.. 류선재는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너의 이름은>


 끝난게 아니었나? 류선재는 어두운 방에 혼자 있었다.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서 그냥 아무것도 없는 꿈을 꾸고 있는걸지도 몰랐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깨야하나. 그보다 그 사람은..

 - 네. 모든 방을 클리어하셨는데요, 나가려면 딱 하나만 더 해주시면 됩니다. 문제도 미션도 아닙니다. 건강한 연인이라면 하루도 빠짐없이, 어쩌면 하루에도 백 번 넘게 하는 일일지도 모르죠.

 자,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당신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것과 동시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알콩달콩한 커플 두분을 따로 둬서 미안해요. 하지만 바로 만나실 수 있을거예요~


 ..

 류선재는 머릿속이 하얘지는걸 느꼈다. 

 "...이름을 모른다면?"


 - 에이. 그럴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연인의 이름을 몰라요.


 "아니, 애초에 연인이 아니라니까?"


 -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상대가 상처 받습니다.


 "하 씨,"


 말이 안 통했다. 하지만 정말 모르는데 어떻게..

 일단 급한대로 아무 이름이나 불러봤다. 워낙 잘생긴 사람이라 이름도 잘생겼을것 같아 알고있는 연예인 이름부터 줄줄 말했다. 급기야 떠오르는게 없어서 여자 이름도 한번 말해봤지만 역시 아니었다. 대체 무슨, 아니 이름이 아니라 성부터 모르는데?

 역시 이름을 물어볼걸 그랬다. 류선재는 뒤늦게 후회했다. 어디 사냐 무슨일 하냐 꼬치꼬치 캐물었으면서 왜 이름은 그렇게 열심히 물어보지 않았나. 그때는 그가 어짜피 다시 안볼 사람이라 하는게 왜인지 서운해서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류선재가 영영 그의 이름을 맞추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 연인이 당신의 이름을 부른지 30분이 지났습니다. [패널티 있음] 모드이므로 지금부터 패널티가 적용됩니다. 

이름을 틀릴 때마다 다음 기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배로 늘어납니다. 1회 오답 시 대기시간 2분, 2회 오답 시 4분, 3회 오답 시 8분, 4회 오답 시 16분동안 기다려야 다른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10회 오답 시 1024분, 약 17시간의 대기시간이 소요됩니다. 하지만 설마 과거의 연인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겠죠? 어서 이름을 불러주세요.

 "미친 놈아!"

 류선재의 입에서 끝내 비속어가 튀어나왔다. 김, 이, 박, 한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성과 대중적인 이름부터 하나씩 조합해서 걸릴 때 까지 읊으려던 계획이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갔다. 
남자는 문제를 듣자 마자 류선재의 이름을 부른 모양이었다. 기분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막막했다. 조금만 늦게 불러줬다면, 류선재는 그동안 아무이름이나 시도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그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더 줄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라면 틀릴 때마다 시간이 늘어난다고 해도 일단 뭐라도 불러봤을지 모른다. 하지만 류선재가 틀릴때마다 그의 기다림 또한 늘어난다는 사실은 이를 주저하게 했다.

 "힌트, 힌트 좀 줘봐요. 원래 달라고 하면 잘 줬잖아요."


 - 당신이 이미 알고있는 이름이라 드릴 힌트가 없습니다.


 오늘 처음 봤다니까 그러네. 
아니, 잠깐만.. 혹시 동명이인일지도 모른다. 류선재의 지인과 이름이 겹치는 경우일 수 있지. 아니면 아까 해봤던 것 같이 유명인의 이름이라던가. 그래도 범위가 훨씬 좁아졌다. 
류선재는 약간 조심스럽게, 그러나 자신없이 대답했다.

 "한규언..?"


 - 아닙니다. 2분의 대기시간이 부여됩니다.


 "씨발, 진짜 미치겠네."

 그나마 최근에 알게된 형 포지션의 인물이라 불러봤는데 역시나 아니었다. 류선재는 기다렸다가 자신이 알고 있는 이름을 신중하게 불렀다. 기회가 많지 않으니 일단 여자 이름은 부르지 않았다. 중간에 연지우도 한번 불러 볼까 했는데, 왠지 모르게 꺼려지고 그런 이름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그만뒀다. 

 주윤재, 경유다, 정혁재, 희윤태...  어느새 벌써 8번째 오답이었고 류선재는 그동안 자신이 알고있는 이름은 한번씩 다 떠올린 것 같았다. 
 떠올리기만 했다는 소리다. 말을 하려면 다시 다음 기회까지 기다려야 했다.


 - 패널티 시간이 지났습니다. 다시 시도하실 수 있습니다.


 이전 오답부터 거의 여덟시간을 기다리기만 했던 류선재가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성찬?"


 - 아닙니다. 9번째 오답입니다. 512분의 대기시간이 부여됩니다.


 "아! 아니, 잠깐만요. 그 사람은 지금 뭐하고 있어요?"


 - ...


 "아니 대답을 하라고..."

 부르면 재깍재깍 나오던 목소리도 이제 패널티 시간동안은 대답이 없었다. 아까 분명히 질문부터 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급해서 생각하던 이름이 먼저 나와버렸다. 또 여덟 시간 가량을 아무것도 못하고 기다려야했다. 류선재는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외로 엄청 흔한 이름일 수도 있지 않나...'

 시간은 지루하게 흘렀고 류선재는 성명학까지 생각하려고 했다가 아는게 없어서 포기했다. 남자의 외모가 말도 안 될 정도여서 그런지 이름도 흔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역으로 엄청 흔한 이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음 시도에는 무조건 질문부터 해야한다. 이것까지 대답해 줄 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잘 들어줬는데 왜..


 - 패널티 시간이 지났습니다. 다시 시도하실 수 있습니다.


 류선재가 또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 지금 얼마나 지났어요? 여기랑 그 사람 있는 곳이랑 시간 똑같아요?"


 - 첫번째 오답 부터 지금까지 17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시간은 같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뭐하고 있어요."


 -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딱 하나만 알려줘요. 흔한 이름이에요?


 -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이름을 불러주세요.


 "성이라도, 뭐든 좀.. 하씨, 우리가 못나가서 당신이 얻는 이득이 없잖아요."


 - 이름이 흔하다는 기준은 주관적 평가가 반영됩니다. 제 대답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입니다. 이름을 불러주세요. 오답으로 간주됩니다.


 환장하겠다. 원래 힌트도 달라는대로 잘 주고 어쩐지 발랄했던 진행자는 류선재가 다서여섯번째 오답을 말한 후로 아주 딱딱해졌다. 연인의 이름도 모르는 쓰레기 새끼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이젠 더 물어보면 답도 말 못해보고 넘어가게 생겼다. 류선재는 아까부터 생각만 하던 이름을 결국 내뱉고 말았다.

 "..김철수?"


 - ...

 대답이 없었다. 설마 이게 진짜 정답?


 - 별칭은 정답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10번째 오답입니다. 1024분의 대기시간이 부여됩니다.


 "아니 씨발,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그 사람이라도 먼저 내보내주면 안돼요? 나는 패널티 시간이건 뭐건 늘려도 좋으니까."


 - ...


 역시나 더 이상 대답은 없었고 얼마나 기다려야 되는지 시간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게 10번째니까 이미 꼬박 17시간을 탈출구 앞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단 소리다. 다음 답을 말하려고 해도 역시 그 정도는 더 기다려야 했다. 

 류선재는 기운도 다 빠졌지만 이름도 모르는 자신의 연인에게 미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이대로 하다간 일 년은 금방이다. 그니까 탈출하는데 일 년이라는게 아니라 다음 이름을 부르기 까지 일 년이 넘게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대로 열 번, 아니 아홉번만 더 틀려도 일 년..'

 이게 말이 되나? 이게 꿈이라면 자신은 이미 한참 전에 깼어야한다. 류선재는 자신의 뺨을 한 대 제대로 갈겼다. 땅에 머리를 몇 번 박아도 보고 허벅지를 세게 꼬집어도 봤다. 아프긴 무진장 아팠고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알고있는 이름은 너무 많았고 그 어떤 것에도 확신은 들지 않았다. 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고 류선재는 어디에든 따지고 싶어서 캄캄한 방을 계속 걸었다. 이름에 대해 계속 생각하며 걸었지만 이 방에는 따질 대상은 커녕 먼지 한 톨도 없는 것 같았다.
커플 테라피라며, 테라피는 무슨 정신병을 얻어서 돌아갈 것 같은데. 돌아갈수는 있는 건가. 이게 꿈은 맞을까. 
그는 뭘 하고있지? 확실히 자신을 밝히지 않아서 후회하고 있을까?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선배, 저 어떻게 해요..."

 머리통이 터지도록 고민하던 류선재는 지쳐서 잠이 들었다.


*


 - ...티 시간이 지났습니다. 다시 시도하실 수 있습니다.


 "어?"

 망했다. 겨우 잠에서 깬 뇌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다음 이름을 말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깜빡 잠이 들었지만 류선재는 잠들기 전에도 이름을 수십 수백개 더 넘게 생각했었다. 

 "..."

 떠오르는 이름은 너무나 많았고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것이든 말은 할 수 있었으나 이런식으로는 오답이 늘어갈 뿐이다. 


 - 연인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류선재는 다시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신기할 정도로 자신과 취향이 잘 맞던 남자. 처음에는 그가 입모양을 미리 읽을 수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같이 세 방을 지나오면서 본 그는 생각보다 성격이 급했고, 어쩔 때는 자신보다 약간 더 빠르게 말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취향이 맞다는 가설이 더 설득력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까지 사람이 잘 맞을수가 있나?

 그는 류선재가 느끼한걸 안좋아한다고 했을때 분명 '그렇겠지' 라고 했다. 닭 다리살을 좋아한다고 했을때는 단순히 게임에서 틀린 것 이상으로 과민반응했다. 마치 자신이 알고있던 사실을 부정당한것 처럼. 

 생각해보면 세번째 방에서 점을 셀 때도 그랬다. 그는 류선재가 점이 적다고 했을때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른다고 했고, 실제로 그가 세었을때 류선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많았다. 세는 중에도 갯수를 센다기 보단 위치를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류선재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같았다.


 - 마지막입니다. 연인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오답으로 간주됩니다.


 "..."

 지금 이름을 말해봤자 맞을 확률은 거의 없다. 차라리 대충 대답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류선재는 무조건 지금 맞춰야 했다. 

 이 방 너머 어딘가에 그가 혼자 있었다. 류선재는 그를 일초라도 더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이미 너무 오래 자신을 기다린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하루 이틀 정도는 우스울만큼 오랫동안,
류선재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며 일 년을, 

 어쩌면, 십 년을..

 류선재는 고개숙여 바닥을 보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이름을 반추했다. 날아간 일년 간의 기억은 빼고. 다시 남자를 떠올렸지만 그 이름들과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어울리지 않았다. 
어쩐지 나를 아는것만 같은 사람. 남자는 가만히 있어도 류선재의 눈엔 가장 강하게 빛나 보였다. 그 어떤 별보다도 더.

 이미 알고 있는데 내가 잊은거라면?

 "강휘 선배..."

 그가 이름을 떠올리기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류선재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떻게 그 이름을 잊을 수가 있을까.

 "김강휘!"


 - ..복수 정답으로 인정됩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갑니다.


 류선재는 거의 소리를 질렀고 이어서 정답을 인정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는 어쩐지 그 소리가 웃고 있는걸로 들렸다. 
잠깐, 왜 복수 정답이지?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고? 그를 보기 전에? 그러면..!

 *


 "잠깐만.. 안돼...."

 "어어, 왜 이래요? 웬일로 잠꼬대를 다 하시지."

 이서목은 자신이 일어났는데도 아직 잠들어있는 룸메이트를 처음보는 바람에 일단 사진으로 찍어뒀다. 그런데 잠꼬대까지 한다. 이서목은 이번에는 동영상을 찍으려 폰을 들었다. 
류선재는 4수를 하는 바람에 동기 대부분이 그보다 어렸고, 이서목 역시 그랬는데 류선재가 꼰대 스타일은 아니어서 편하게 지내는 중이었다.

 "강휘 선배..."

 "누구요? 형, 일어나세요. 지금 안일어나면 늦습니다."

 "..."

 "미친, 형 설마 울어요?"

 류선재가 곧 잠에서 깼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일어나서 무언가를 찾는 듯 고개를 휙휙 돌려가며 방안을 봤는데, 그걸 보는 이서목은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형 왜 그래요? 무서우니까 그만해요. 영상 뿌릴거야.."

 "...핸드폰이나 내려."

 "넵."

 이서목은 그때까지도 찍고있던 동영상을 드디어 종료했다. 류선재는 뭔가 필요한 것을 놓친 느낌이었는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꿈도 엄청나게 중요했던것 같은데, 꼭 기억해야 하는 내용인데 다 잊어버렸다. 심장이 아직도 미친듯이 뛰고 있었다. 

 "원래 꿈 안꾸는데, 이상하네... 그런데 뭔 꿈인지 기억도 안난다."

 "어제 훈련이 너무 빡셌나보죠. 형, 근데 손에 그거 뭐예요?"

 "음?"

 이서목이 류선재의 왼손을 가리켰다. 류선재는 잠에서 깬 후 지금까지 계속 꼭 쥐고있던 왼손을 드디어 폈다.


 별이라기엔 너무 작은, 엄지손톱만한 별이 가만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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