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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지자고요?"

 

 "뭐?"

 

 

 헙. 제 입으로 뱉어놓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양 손으로 입을 탁 틀어막았지만 이미 눈 앞의 남자는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어이가 단단히 털린 표정. 그가 그러지 않아도 류선재도 잘 안다. 헤어지긴 뭘 헤어져? 헤어진다는 건 사귄다는 조건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죄송해요. 말실수예요."

 

 

 빠르게 실수를 인정하자 무어라 하려던 상대도 입을 다물었다. 아니, 지금 입을 다물면 안되지. 그는 자신의 말을 제대로 설명해야 했다. 잘만 만나던 게 벌써 몇 개월인데, 물론 만난다의 의미는 말 그대로 서로의 낯짝을 마주하는 거였지만, 아무튼 이제와서 이럴 수는 없는 거다. 그는 자신의 잘 정돈된 앞머리를 몇 번이고 다시 쓸어넘겼다. 착잡하다는 표정이 뒤지게 섹시했다.

 

 

 "너 공부 안 해? 학생이 학생 본분을,"

 

 "그건 제가 알아서 하고요..."

 

 

 공부 얘기에 기가 팍 죽었다. 류선재가 성적이 나쁜 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얘기가 나올때면 괜히 어깨가 처졌다. 그와 자신 사이에 자리한 절대 건널 수 없는 나이차의 간극이라는 거대한 강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기분이기 때문이었다... 류선재야 그깟 것에는 처음부터 신경쓰지 않았으니 문제가 되는 건 상대였다. 그는 이 얘기를 제 입으로 꺼내고서도 짙은 현타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알아서하긴 개뿔이, 너 맨날 야자째고 나오는 거 모를 줄 알아?"

 

 "이번 학기 야자 신청 안했는데요."

 

 

 신청? 그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류선재는 5초 뒤에 깨달았다. 야자, 그니까 야간자율학습의 강제성이 전면폐지된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 앞의 남자는 문이과 폐지도 모르던 사람이었다. 하기사 그는 매달 급식비를 내던 세대였고 수능은 탐구과목을 네 개씩 쳤으며 류선재가 걸음마를 뗄 때 그는 대입을... 거기까지 생각한 류선재는 머리를 마구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싫어요."

 

 "뭐가."

 

 "연락하지 말란거요."

 

 

 허, 남자가 헛웃음을 뱉었다.

 

 

 "나도 싫어요, 너한테 계속 연락 오는거."

 

 

 이딴 식의 말싸움으로 나가자면 끝이 없다. 무슨 초딩도 아니고... 게다가 류선재는 지금 이 상황에서 밀리면 끝장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둘은 어디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고 대화하는 것도 아니었다. 코 앞이 차가 쌩쌩 다니는 왕복 6차선 도로였다. 그의 차는 어중간하게 도로 한켠에 서 있었고 류선재와 남자는 그 바로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남자는 애초부터 류선재에게 이 말 만을 하려고, 더이상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작정을 하고 온 듯 했다. 여지? 무슨 여지. 이것도 남자가 들으면 한참 비꼴거였다. 여지니 뭐니 하는 것도 류선재 혼자만의 생각이니 말이다.

 

 

 "좋아해요."

 

 "난 싫다니까?"

 

 "그 얘기 아닌 거 알잖아요."

 

 

 남자는 이 시답잖은 말싸움을 이어가려다 끝내 올 게 왔다는 걸 깨달은 듯 했다. 하지만 어쩌라고? 지도 하고싶은 말 다 했으면서 류선재만 참을 필요는 없었다.

 

 

 "형 좋아한다고요, 저."

 

 

 그리고는 정적이었다. 류선재는 이런 고백은 생각도 안 해봤다. 여자친구를 사귈때도, 물론 고백받은 적만 있었지만 나름의 로망이 있었다.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의 저녁, 싱그러운 꽃다발, 신경 쓴 차림새에서는 살짝 뿌린 향수 냄새가 나고, 눈을 마주친 채 서로가 은은하게 눈치챈 고백을 건네는... 류선재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렇게 고백하리라고 마음 먹었더랬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과는 일치하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여긴 차가 시끄럽게 다니는 퇴근길 도로였고 꽃다발은 무슨, 류선재의 손에는 책가방이나 들려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차림새 또한 땀내가 좀 날 것 같은 교복이었다. 오기 전에 탈취제에 향수까지 뿌렸으니 설마 냄새가 나진 않길 바랄 뿐이다. 하여튼 이건 그는 물론 류선재도 예상치 못한 고백이었다. 애초에 여기에 고백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는지부터가 의문이다.

 

 

 "진심이에요."

 

 "그만해."

 

 

 또한 그는 이 고백을 아주 난처하게 생각하는 듯 했고... 그걸 보고있자니 류선재는 꽉 움켜쥔 손아귀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가는 듯 했다. 손바닥을 교복 셔츠자락에 마구 문질러 닦았지만 이번엔 손아귀가 아니고 눈가가 축축해지려고 했다. 남자는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며 먼 곳만 응시했다.

 

 

 "너 어려서 착각하는 거야."

 

 

 차라리 이것도 그냥 싫다고 하지, 아니면 자긴 남자는 취향 아니라고 하든가. 왜 하필 나이 핑계를 대냔 말이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둘은 주민번호 앞자리부터가 숫자 두 개 차이가 났으니 나이 얘기는 빼 먹을 수 없는, 그러니까 그 자신의 취향에 대한 문제보다 앞서는 게 당연했다. 이성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착각이라니. 그는 몰라도 류선재는 진심이었다. 자신이 생각하기로 스스로가 가진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었다. 류선재는 불현듯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은 어느 날을 떠올렸다.

 

 

 "원래 너 나이때는 그런다고도 하더라."

 

 

 그는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던 류선재가 조용해진 걸 본인 입장에서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인 듯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류선재를 달래기 시작했다. 사실 이거야말로 진짜 착각이다. 그는 스스로가 이성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으나, 사실은 띠동갑이 넘는 남자한테 사랑고백을 한 애새끼의 평소 콤플렉스를 자극한 것 뿐이었다. 그의 '이성'이라는 건 지금 감정에 휩쓸리고 있는 열일곱 어린애 앞에서 내세울만한 게 아니다.

 

 

 "나이먹고 이불찬다? 못 들은걸로 할테니까 으븝,"

 

 

 그 또한 자신의 행동이 그 열일곱 애새끼의 충동성에 불을 붙일 줄 알았더라면 이딴 소리는 안했을 거다. 남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류선재는 한 5초쯤 지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남자의 입술은 까슬했지만 참 말랑했다. 하긴 거의 박치기 수준에 이가 부딪히기까지 했으니 뭔들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말랑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이왕 갖다박을거 좀 찐하게 혀도 넣어볼걸 하는 후회가 좀 들었다.

 

 

 그는 류선재가 다시 한발짝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입술을 더듬어봤다. 아마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는 모양인데 점점 바뀌는 표정을 보아하니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은 듯 했다. 이제서야 상황파악이 된 것 같았다. 고딩한테 주둥이 박치기를 당했다는 거 말고, 류선재가 지금 진심이라는 사실 말이다. 와중에 류선재는 그가 입술을 박박 문질러 닦거나 자신을 쥐어패지 않았다는 점에 위안을 얻었다. 그럼 아주 싫다는 뜻은 아니잖은가? 그는 몇 번이고 마른세수만 하더니 도망치듯 급하게 차 문을 열며 작별을 고했다.

 

 

 "아직 어리니까 귀여워서 넘어가는 거야. 내 번호 삭제해. 예쁜 여자친구 사귀고. 안녕."

 

 

 물론 이걸 그냥 보고만 있을 류선재가 아니다. 소매를 덥썩 붙잡아 멈춰세우자 그가 눈을 맞춰왔다. 그의 밝은 헤이즐넛 색 눈동자는 이렇게 쨍한 햇살 아래서 볼 때면 평소보다도 훨씬 맑고 밝게 보였다. 류선재는 그 눈을 보며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저 귀여워요?"

 

 "야이 개..."

 

 

 그는 눈을 꾹 감은 채로 고개를 젖혔다. 한 손이 주머니에서 꾸물대는 게 담배가 말리는 것 같았다. 류선재는 그가 담배를 꺼내면 불이라도 붙여줄 작정으로 교복 바지 속의 라이터를 만지작댔다. 예상대로 그가 곧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의 집게 손가락에 들린 작고 반짝이는 그건... 반지였다.

 

 

 "선재야."

 

 

 그는 멍하니 반지만 쳐다보고 있는 류선재를 다잡듯 불렀다. 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햇빛을 흡수해 반짝였다. 덕분에 류선재는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그의 손이 살짝 떨리며 보석이 반사한 빛이 류선재의 눈에 직빵으로 비췄다.

 

 

 "나 결혼해."

 

 

 눈이 너무 부셨다...

 

 

 류선재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는 틈을 타 그는 곧장 차에 올라탔다. 어느새 그 자리에는 류선재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첫키스... 아니, 사랑하는 사람과 한 첫 뽀뽀의 날카로운 추억과 함께 이 왕복 6차선 도로에.

고딩에 환불이 어딨어? 좋다매?

W. 와자자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도 모를 류선재는 밤이 새도록 엎드려 울었다. 후폭풍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아까는 뻔뻔하게 말대꾸까지 했는데 곱씹어보니 너무 속상했다. 뽀뽀했다... 그리고 그 전에 차였다. 그냥 차인 것도 아니고 마음을 부정당한 건 물론 결혼한단 소리까지 들었다. 어려서 착각하는 거라고? 이런 말은 나이차 많이 나는 커플이 등장하는 드라마에서나 들어봤다. 직접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니, 사실 그런 말을 하는 그를 상상한 적은 몇 번 있었는데 그땐 오히려 좀 꼴린다고 생각했고. 아무튼 그딴 소리를 들을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물론 그도 거기서 고백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거긴 한데, 하여튼 그 직후에는 '나 결혼해' 라는 웬 날벼락같은 소리까지 했으니 데미지로 따지자면 류선재 쪽이 훨씬 깊을 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를 원망하거나 그러는 건 아니다. 마음 안 받아줬다고 앙심품는 건 범죄자나 준범죄자가 하는 짓이었다. 류선재는... 그냥 속상했다. 결혼까지 약속한 상대가 있는 줄도 모르고 들이댄 것도 미안했고, 그게 티가 안 나지 않았을텐데 꾸역꾸역 모른 척 받아준 게 고마웠고, 자신은 그런 줄도 모르고 되려 그의 마음을 착각한 건 또 미안했고, 결국 그의 입에서 그만 연락하라는 소리가 나오게 해버린 건 너무너무 미안했다.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고 사랑한단 소리까지 꺼낸 주제에 이런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도, 마지막에 작별인사도 못한 것도...

 

 

 류선재는 그 남자를 처음 만난 날 사랑에 빠졌다. 물론 그때는 몰랐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랬다는 거다. 아침햇살 아래 피로함과 당황스러움으로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살피던 잘생긴 남자... 아니, '잘생겼다' 정도로 표현하면 안된다. 류선재는 그를 처음 마주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남자가 같은 남자를 보고 이러기도 쉽지 않은데.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과 헤이즐넛 색 눈동자는 아침의 맑은 공기 아래 부드럽게 빛났고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자리잡은 얼굴은 내리쬐는 햇살보다 더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모친이 맹신하는 신은 인류의 첫 사람만을 직접 빚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를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신이 21세기 인류의 미적 감각에 탄복해 두번째 창조를 했다면 딱 저렇게 생겼을 거였다. 그 순간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고 자연광은 하이라이트 조명이 되어 그만을 비추는 듯 했다. 그건 정말이지, 교통사고와 같은 거였다... 이걸 차치하고도 접촉사고가 있긴 했는데 크게 중요하진 않다.

 

 

 사건 경위를 좀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 날은 평일 오전이었고 류선재는 등교하는 중이었으며 그는 아마 퇴근하는 중이었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골목길에서 잠시 한눈을 판 류선재는 마찬가지로 잠시 한눈을 판 그의 차 머리에 허벅지가 들이받혔다. 그건 딱 누군가 밀친 수준이었는데 방심해서 엎어진 탓에 자존심이 좀 다쳤을 뿐 몸은 멀쩡했다. 차는 류선재를 들이받자마자 정지했고 곧 운전석에서 사람이 내렸다.

 

 

 "괜찮아요?"

 

 

 다시 말하지만 그건 물리적으로는 접촉사고였으나 비물리적으로 보자면 교통사고였는데 따지자면 뺑소니 수준이었다. 남자는 류선재가 멍하니 서있는 꼴을 보고는 머리를 다친 거냐며 구급차를 부르겠다고 했다. 머리? 머리는 멀쩡했다. 물론, 비물리적으로는 멀쩡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물리적으로는 완전히 멀쩡했다.

 

 

 남자는 류선재의 만류에 떠밀려 구급차를 부르는 대신 명함을 건넸다. '병원 가보고 이상 있으면 연락해요.' 세련된 까만 명함에는 그의 이름 석 자와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김백경, 010-xxxx-xxxx. 그가 자리를 뜨고도 류선재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관성으로 등교까지는 성공했으나 류선재는 온종일 멍하니 그 이름과 목소리를 되새겼다. 연예인인가? 아니, 명함을 보니 연예인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실장이라고... 아니, 그 얼굴이 어떻게 연예인이 아니란 말인가? 삼대 기획사는 뭘 하는거지? 제 2의 아시아 프린스, 아니 글로벌 프린스로 돈을 쓸어담을 수 있을텐데. 어쩌면 그가 건넨 명함은 자신의 매니저 명함일지도 모른다. 데뷔한지 얼마 되지 않았더라면 연예인에 관심이 없는 류선재는 여태 그를 몰랐을 수도...

 

 

 그 날 류선재는 흔치않게 수업시간에 지적을 받았다. 어디 아프냐는 친구들과 담임의 걱정은 덤이었다. 그러나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차에 들이받힌 허벅다리는 멀쩡했다. 멀쩡하지 않은 건 어디 부딪힌 적도 없는 류선재의 머리였다. 이런 건 병원에 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류선재는 하교 후 축구며 뭐며 하는 제안을 다 거절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교복 자켓 안주머니에는 여전히 그 까만 명함이 들어있는 채였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는 그대로 방에 처박혔다.

 

 

 류선재는 불꺼진 자신의 방 안에서 베개에 대가리를 처박고 아침의 사고에 대해 생각했다. 부드러운 회색이 도는 차, 거기서 내린 기가 막히게 잘생긴 남자. 그걸 생각하고 있자니 자꾸 손발이 저린 것 같기도 하고 간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한참 몸을 뒤척이다가도 멍하니 천장에 박힌 LED 등만 쳐다보기도 했고 그러다가는 또 베개에 머리를 박았다.

 

 

 창 밖은 어느새 어둠이 내렸고 시간도 꽤 늦은 듯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가슴이 꽉 막힌 듯 하면서도 간질간질했다. 개미를 한움큼 삼키면 딱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참을 시간만 버리다가 가까스로 낸 결론이 무조건 그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병원도 안 갔고 몸은 멀쩡했지만 아무튼 그래야 했다.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메시지 창을 킨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뭐라고 해야할지였다. 류선재는 타고난 외향성으로 처음 보는 사람과도 쉽게 대화를 이끌어갔으며 불편하지 않은 분위기를 조성할 줄 알았다. 과장 좀 보태 말하자면 모르는 사람과 대뜸 한 방에 집어넣는대도 십 분이면 그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아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겨우 첫 마디가 생각나질 않았다. 아니, 생각나기는 했는데 스스로가 보기에도 헛소리였다. 묻지도 않은 자기소개며 그쪽 인상이 참 좋더라는, 그런... 무슨 홍대바닥에서 번호 딴 것도 아니고 이건 말도 안됐다. 아니, 번호따고도 이렇게 말은 안 할거다. 남의 번호를 따본 적은 없었지만 그 반대를 몇 번 경험한 바 기억을 되살려보니 적어도 이딴 식의 첫마디는 듣도보도 못했다. 이건 따지자면 지하철 출구 근처를 배회하는 일명 도쟁이와 가장 유사했다. 한 마디로 후졌다. 분명 적절한 말이 따로 있을텐데...

 

 

 이럴 때는 집단지성인지 뭔지를 빌려야했다. 류선재는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을 누른 채 한참을 고민했다. 무슨 썸 처음 타보는 초딩도 아니고 이런 걸 검색하고 자빠진게 우습긴 했다... 썸은 무슨,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그쪽은 교통사고 가해자였고 류선재는 교통사고 피해자였다. 결국 류선재는 '교통사고 연락 어떻게'를 검색했다. 그리고 갖은 블로그, 카페, 익명 질문창을 통해 어떻게 해야 가해자의 집안 기둥부터 골수까지 쪽쪽 뽑아낼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무슨 한방 병원에 입원하라고?

 

 

 메시지 창으로 돌아와 류선재는 여태 생각한 첫마디들을 되새겼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리 구리고 이상해도 한방병원 진단서 떼서 첨부하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지지 않다는 건 아니었는데... 류선재는 메시지창이 둥둥 뜬 휴대폰 화면만 한참동안 노려봤다. 시작이 반이라고 별 거 아닌 첫마디만 떼면 다 해결될 것 같은데 그게 제일 어려웠다. 하긴 반이나 가는 게 쉽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였다.

 

 

 결국 류선재가 고르고 고른 말은 한국인으로 태어나 엄마 다음으로 배우는 말 차트 10위권 안에 드는 가장 흔한 인삿말이었다. 여태 생각한 것 중엔 제일 나았다. 사실 류선재가 원한 것은 이런 평범한 인삿말이 아니었다. 초면에 부담스럽지 않지만 적당히 위트있으며 무례하지는 않은데 아주 딱딱하지도 않고 한방병원 입원하지도 않았다는, 아니 신체가 아주 멀쩡하다는 뉘앙스까지 은은하게 풍길 수 있는... 그런 말이었다. 하지만 어쩌리, 이게 최선이었다.

 

 

 [안녕하세요] 읽음 오전 5:13

 

 

 그리고 이게 최선이 아니라는 현실은 오 초 뒤에 깨달았다. 오전 다섯 시 십삼분... 이거 미친새끼 아닌가? 심지어 읽었단다. 밖은 아직 해도 안 떴다. 설마 그가 자신이 보낸 문자 알림소리에 깬거라면 스스로의 의지로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고 싶었다.

 

 

 [병원 갔다 왔어요?]

 

 

 그런 와중에 답장이 왔다. 누군지 밝히지도 않았지만 용케 류선재임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안 가도 돼요]

 

 [그냥 갔다와요. 부모님께는 말씀 드렸고?]

 

 

 둘은 한참 실랑이를 했다. 그는 병원에 가라고 했고 류선재는 멀쩡하다고 우겼다. 허벅지에는 멍도 안 들었다. 이런 걸로 병원에 가봐야 진료비만 나올텐데 그도 물러서지 않았다. 종래에는 류선재가 멀쩡한 허벅지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서야 잠잠해졌다. 끈기있게 몇 초 간격으로 텍스트를 보내던 그는 이번엔 몇 분이나 지나서야 답장했다.

 

 

 [알았어요. 나중에 문제 생기면 연락하고 부모님한테 말씀드려요.]

 

 

 그리고 끝이었다.

 

 

 거기다가는 알겠다는 대답 외에 다른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당연하지만 이후로는 연락할 일이 없었다. 문자내역은 오전 다섯시 십 삼분부터 이십 오분까지 이어진 대화에 멈춰있었다. 류선재는 몇 번이고 화면의 맨 위로 스크롤을 올렸다가 맨 아래로 내리기를 반복했다.

 

 

 무슨, 십 분이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류선재는 십 이분간의 문자를 통해 그가 병원에 가라는 말을 다섯 번 했다는 사실만 알아냈다. 알아내긴, 그냥 숫자만 센 거다. 게다가는 시작이 반이라고 첫 마디만 떼면 다 해결될 것 같다느니 하는 것도 다 기분탓이었다. 정말 딱 반만 갔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어쩌면 교통사고 후처리로 골머리를 좀 썩혔을 그의 마음은 해결됐을지도. 하여튼 그게 끝이었다. 등굣길 접촉사고라는 우연의 힘은 딱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우연. 우연이란 무엇일까?

 

 

 우연² (偶然)

 

 [명사]1.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

 

 

 사전에는 이렇게 나와있다. 그 날의 사고는, 이를테면 그가 모종의 이유로 류선재에게 상해를 입히기 위해 그 자리에서 대기하다 엑셀을 밟았거나 혹은 류선재가 자해공갈단이라 그의 차에 뛰어든 게 아닌 이상은 우연이었다. 우연에는 힘이 있다. 무인과가 낳는 인과란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중적이게도 우연은 우연일 뿐이므로 그 힘 또한 이름만큼이나 나약하다. 그 날 접촉사고의 우연은 딱 십 이분어치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류선재가, 이 푸른 대기권 아래 붉은 흙을 밟고 살아가는 무력한 인간이 무인과를 통해 새로운 계기를 부여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조금 더 드라마틱하고 요술적인 무언가...

 

 

 그게 무엇인지 짧은 인생을 살아온 류선재로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여튼 우연은 우연일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우연에 운명이라는 새 이름을 부여하는 순간부터 관조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친이 어릴적부터 세뇌하다시피 한 종교에서는 모든 고통은 신의 안배 혹은 사탄의 농락이었으며 모든 기쁨은 신의 은혜였고 이러한 신의 개입을 운명이라고 했다. 그래서 류선재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삶의 갈림길을 걷게 함이 실존의 증거조차 찾을 수 없는 존재의 농간질에 따른 것이라기엔 한낱 미물인 류선재는 그 자신이 스스로의 두 다리만으로 세상을 살아나간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나?

 

 

 류선재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중이다. 유월 말이었으나 유난히 무더웠다. 해는 아직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작열하는 빛 아래 몇 십분간 길거리를 헤맸으니 당연하기도 하다. 하필 날이 이런 바람에 에어컨 바람이 솔솔 부는 버스에서 잠들고 말았다. 맘씨 좋은 누군가 깨워준 덕분에 종점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하차하고보니 영 모르는 곳이었다. 급하게 지도앱을 켜 돌아가는 버스를 찾아냈지만 갈아타는 정류장이 저 먼 곳에 있었다.

 

 

 류선재는 평소 휴대폰 충전마저 성실히 했으나 오늘은 무슨 마가 끼었는지 잔량이 5퍼센트가 채 되지 않았다. 결국 휴대폰은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그러니 이제 류선재는 어딘지도 모르는 버스정류장을 찾아야 했다. 까짓거 택시를 탈 수도 있겠으나 이 동네는 그 흔한 택시도 잘 보이질 않았다. 게다가 요새 택시비가 폭등하는 바람에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택시를 타기엔 학생인 류선재로선 좀 쫄렸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버스정류장이 아주 멀지도 않은 것 같았으니 그런 건 낭비였다.

 

 

 그리고 그게 완전히 착각이었다는 건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낯선 곳에서 어딘지도 모르는 버스정류장을 찾는 건 상당한 발품을 필요로 한다는 걸 21세기 실시간 지도앱이라는 문명에 찌든 류선재는 몰랐다. 일찌감치 꺼낸 하복은 어느새 땀으로 눅눅하게 젖어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류선재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얼마 전 교통사고로 딱 십 이분 간 문자를 나눴던 남자. 그는 골목 한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겨우 두 번째로 얼굴을 본 참이었기에 웬만하면 못 알아볼 법도 했으나 그 얼굴은 쉽게 잊히는 게 아니었다. 류선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내어 인사를 해버렸다. 고개까지 꾸벅 숙였는데, 사실 처음부터 인사를 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이건 따지자면 대한민국 고딩으로서 가진 관성과도 같은 인사성이었다.

 

 

 "안녕."

 

 

 그는 바로 류선재를 알아본 듯 슬쩍 웃으며 마주 인사를 건넸다. 피우던 담배는 바닥에 마구 비벼끈 뒤 천천히 다가왔다. 류선재의 이마 가장자리에 송글 맺혔던 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여기서 뭐해요?"

 

 "길을 좀, 잃어갖구요."

 

 "에고."

 

 

 급하게 손등으로 땀을 훔쳤지만 상대는 이미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뒤 인근 자신의 차를 가리키며 데려다줄지를 물었다. 이런 때에 냉큼 얻어타는 것만큼 없어보이는 짓도 없을테고 류선재도 그렇게까지 지치진 않았다. 그러니 그냥 버스정류장이 어딘지만 물어도 될 일이었는데... 거기까지 채 생각이 닿기도 전에 대답이 먼저 튀어나왔다.

 

 

 "감사합니다."

 

 

 냉큼 나온 소리에 그는 킥킥 웃었고 류선재를 에스코트라도 하듯 이끌어 뒷자석 문을 열어주었다. 냉큼 탈 뻔 했지만 딱 그 타이밍에 언제인가 들었던 '남의 차 얻어탈 때의 예절'을 떠올리고 스스로 조수석 문을 열었다. 차 앞머리를 빙 돌아 운전석에 탄 그가 안전벨트를 휙 당겨 맸다.

 

 

 "뒤에 타도 되는데."

 

 

 못 들은 척 벨트를 따라 매자 그는 목적지를 물었다. 집 근처 역을 말하니 그가 네비게이션에 역 이름을 입력했다. 그러고보니 차에서 참 좋은 냄새가 났다. 차량용 방향제처럼 거슬리는 향이 아니었는데, 맡다보니 그게 그가 뿌린 진득한 향수냄새였음을 알 수 있었다. 류선재는 원래 향수에 관심이 없었다. 모친이 향수에 조예가 있었기에 어머니로부터 선물받은 향수가 몇 있었는데 그건 죄다 은은한 나무 냄새가 나는 것들 뿐이었기에 이런 진한 향은 처음 맡아봤다. 그의 향수 냄새는 어찌나 짙은지 보통 차에서 날만한 갑갑한 냄새가 전부 묻혀버렸다. 그렇다고 거슬리는 향이라는 건 아니고. 그건 달큰한 듯하면서도 살짝 매캐한 것 같기도 하고, 시원한 듯 하면서도 코 끝에 질척하게 엉겼다.

 

 

 '뭔 놈의 향수가 이렇게 야하지?'

 

 

 사람을 앞에, 아니 옆에 두고 이딴 생각을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류선재의 감상은 그랬다. 이렇게 진한 향은 원래라면 싫어하는 편에 가까웠으나 이다지도 화려한 얼굴을 한 남자에게 대자니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러고보면 그는 얼굴 한 켠에 흉터가 있었다. 아주 짙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눈에 띄지 않을만큼 옅지도 않았다. 눈가에 진 탓에 그를 마주볼때면 흉터도 함께 볼 수 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그건 신기하게도 화려한 미를 구형하는 요소로 보였다.

 

 

 "형."

 

 "어?"

 

 

 그가 당황한 듯 얼탄 소리를 했다. 몇 번이나 봤다고 너무 부담스러운 호칭이었나 싶었지만 그게 이유가 아니었다.

 

 

 "고등학생 아니에요?"

 

 "맞는데요."

 

 "아저씨라고 해."

 

 

 웬 아저씨? 많이 쳐봤자 이십대 후반으로 보였다. 그럼 적어도 고딩한테 형 소리 듣는 게 이상한 나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고딩이 형이라고 부르면 그쪽 입장에선 땡큐 아닌가? 굳이 선 그으려는 게 아니라면 그런 소리를 할 이유가 없는데, 선을 긋는다기엔 먼저 데려다주겠다고 한 게 그쪽이었다. 하여튼 류선재가 그를 부른 건 물어볼 게 있어서였다. 호칭 정정 요청은 못 들은 척 할 말을 이어갔다.

 

 

 "형 연예인이에요?"

 

 "아아니요."

 

 

 대뜸 연예인이냐는 소리에 놀랄 법도 했는데 그는 형이라는 호칭에 더 당황했던 것 같았다. 하긴 이 남자가 그런 소리를 처음 들어봤을 리가 없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들을 테다. 하여튼 연예인이 아니라는 건, 첫 만남에 받은 명함은 정말 그의 것이 맞다는 뜻이었다.

 

 

 김백경. 어떤 한자를 쓸 지는 몰라도 동명의 소설이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왠지 차갑게도 느껴져 그와 마냥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단조로운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마치 지금의 그를 보고 조형된 듯 보기에도, 곱씹어 읽기에도 좋았다. 보통 개명을 하지 않는 이상 갓난쟁이를 보고 이름을 짓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작명한 분도 참 선견지명이 뛰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근처 고등학교 다녀요?"

 

 "아뇨, xx동에."

 

 "뭘 어째야 거기서 여기까지 와요?"

 

 "버스에서 졸아서..."

 

 

 김백경은 푸학, 하는 소리를 내더니 낄낄 웃기 시작했다. 좀 황당하긴 했지만 류선재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없는 실수라 핀잔을 주기도 민망했다. 김백경은 혼자 한참을 웃다가 눈가에 맺힌 눈물까지 닦았다. 아니 뭐가 그렇게 웃기다고. 자기는 살면서 대중교통에서 졸아본 적도 없나?

 

 

 ...자기? 몇 번이나 봤다고 자기라는 소리는 좀 그랬다.

 

 

 "형은 여기 사나봐요."

 

 "근처에서 일해요."

 

 "...지금 저 데려다줘도 되는거 맞아요?"

 

 "설마 잘리겠어?"

 

 

 그리고는 또 혼자 피식 웃었는데, 류선재는 해고 위험의 직장인이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앉은 처지로서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김백경은 책가방을 끌어안고 있는 류선재의 경직된 표정을 보더니 또 한 번 웃었다.

 

 

 "장난이고, 시간 많아서 태워준거니까 부담갖지마요."

 

 

 그는 무표정일때 풍기는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잘 웃었다. 예의상의 미소가 아니라 그냥 웃음 자체가 많았다. 전부 류선재를 놀리느라 터진 웃음이었지만 하여튼 그가 웃는 건 참 보기 좋았다. 그만한 미남이 웃는 걸 보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그렇게만 설명하기는 아쉬웠다. 김백경은 눈꼬리가 부드럽게 늘어진 데 반해 눈썹 산이 높았다. 덕분에 눈을 접어가며 웃을때면 짙은 눈썹이 더 돋보였는데, 그게 무표정일때와 달리 짓궂어 보이는 매력이 있었다.

 

 

 도로를 한참이나 달려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대체 버스에서 얼마나 처 잔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러시아워에 걸치지 않아 이정도였는데 그가 돌아가는 길은 분명히 꽉 막힐거였다.

 

 

 "죄송해요. 이제 차 완전 막힐텐데..."

 

 "시간 많다니까. 괜찮아요."

 

 "그래도."

 

 "저 앞에서 내려주면 될까요?"

 

 

 류선재가 힘없이 고개를 꾸닥였다. 그걸 본 김백경이 나직하게 무어라고 중얼거린 것 같았는데, 마침 바로 옆으로 버스에 트럭이 연달아 지나가는 바람에 류선재는 그걸 정확히 듣지 못했다. 그는 류선재의 까슬한 뒤통수를 북북 문질러주며 달래듯 말했다.

 

 

 "별 게 다 죄송해. 정 그러면 접촉사고 합의금으로 택시 탔다고 생각해요."

 

 

 다정하다... 사람이 이렇게 잘생겼는데 성격까지 좋아도 되는걸까? 머지않은 미래, 류선재는 '성격까지 좋아도'에 X표를 쳤지만 하여튼 이건 나중 이야기고 지금은 이 남자의 상냥함에, 그리고 이게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에 눈물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이윽고 갓길에 차를 댄 김백경이 손수 안전벨트를 풀어줬다.

 

 

 "잘 가요. 다음엔 졸지 말고?"

 

 "감사합니다..."

 

 

 가방을 끌어안은 채 허리까지 꾸벅 숙이자 김백경은 또 웃음을 팍 터뜨렸다. 그는 손을 흔들어줬고 이제 류선재는 조수석 문을 닫기만 하면 됐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그를 만났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연의 힘은 나약하기 짝이 없기에 첫 만남의 우연이 그러했듯 이번의 우연 또한 여기까지임을 류선재는 직감했다. 두 번째 만남은 요행이었다. 그러니 세 번째 우연을 바랄 수는 없었다. 이렇게 그와 헤어지고 나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였다.

 

 

 문을 완전히 닫기 직전 류선재는 그걸 급하게 다시 열었다. 김백경은 두고간 게 있냐는 듯 선량한 표정으로 류선재를 응시했다.

 

 

 "그래도요, 제가 너무 죄송해서."

 

 "응?"

 

 "다음에 커피 살래요."

 

 

 그리고 문을 쾅 소리나게 닫았다. 마지막으로 본 김백경은 부드럽게 류선재를 응시하던 그대로 눈만 동그랗게 커진 모습이었다. 그와 더 마주할 자신이 없어 급하게 문을 닫은 거였다. 남의 차 문을 너무 세게 닫았나 싶었는데 막상 말을 던지고 보니 좀 민망한 바람에 팔에 힘이 빠지질 않아 어쩔 수 없었다. 류선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몇 번이고 되뇌였다.

 

 

 운명은 개척해나가는 것...

 류선재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정확히는 한낱 미물의 삶을 좌지우지하려드는 절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거였다. 인간은 스스로의 두 발로 인생의 굴곡을 다져나가는 실존이었다. 그 굴곡마저도 사유하는 짐승이 제 손으로 직접 선택하는 것이라 믿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건, 류선재 그 스스로는 몰랐으나, 그가 살면서 굴곡이라고 할만한 고난을 겪어본 적 없는 탓이 컸지만 하여튼 그랬다.

 

 

 이튿날 저녁 여덟시 정각, 류선재는 이미 써두고 하루종일 몇 번이고 곱씹어 검토한 텍스트를 김백경에게 전송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대강 이 시간이면 사적인 연락을 받기에 나쁘지 않은 시간일 것 같았다. 뭔들 새벽 5시보다는 낫겠지만. 답장은 금세 왔다. 그는 몇 번이고 거절했으나 류선재의 우김과 끝내는 찾아가겠다고 통보한 끝에 마지못해 시간을 정해줬다.

 

 

 때는 주말이었고 한가로운 오후였다. 류선재는 며칠 전 김백경을 만났던 장소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김백경이 약속에 늦은 건 아니고, 그냥 류선재가 두 시간정도 빨리왔다. 오후 약속을 잡아놓고 왜 굳이 일찍 왔냐면 그냥 집에서 그 시간만 기다리기 힘들어서 그랬다. 전 날 일찍 잠든 것도 아닌데 약속 당일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약속시간까진 거의 열 시간은 남았는데 시간이 참 더디게 갔다. 때문에 평소 하던 갖은 운동에 공부까지 해봤으나 집중이 하나도 안됐다. 삼십분쯤 지났나 싶으면 오분이 흘러있었고 정오는 됐다 싶었을 때는 여즉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는 이른 오전이었다. 그랬으니 약속시간을 겨우 두 시간 남겨두고 도착한 건 다 류선재의 깊은 인내심 덕이었다.

 

 

 이 동네는 뭐하는 덴지는 몰라도 강남구에 속해 있으면서 주말 오후의 거리가 한적했다. 주택가도 아니었고 상가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포차나 음식점이 없어서인지 몇 보이는 사람들마저도 이곳이 목적지는 아닌 듯 금세 거리를 벗어났다. 류선재는 그 가운데서 방황하다 통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짧은 머리칼과 옷차림을 정돈했다.

 

 

 사실 여기 나오기 전 옷 고르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소요됐다. 맨날 입는 건 교복이었고 이전 여자친구와 데이트 할 때 입었던 옷을 생각해보자니 죄다 커플룩이라 시키는 대로만 입으면 됐었기에 옷차림을 고민하는 것도 너무 오랜만이라 마땅한 게 생각나질 않았다.

 

 

 '데이트..?'

 은혜 갚으러 가는 주제에 무슨 데이트 생각을 다 한단 말인가... 언감생심이었다. 아니, 언감생심?

 의미없이 꼬리의 꼬리를 무는 생각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다. 하여튼 지금 입은 옷은 화장실에 가다가 류선재가 옷장 속 옷을 다 끄집어 낸 꼬라지를 본 류선희의 도움으로 골라낸 거였다. 미대 간다느니 어쩌니 하더니 이런데서 도움이 다 됐다. 사실 류선재의 장황한 상황설명을 다 들은 류선희가 골라준건 무난하기 짝이 없는 셔츠에 슬랙스였다. 그런데 류선희가 말하길, 김칫국 마신게 티나는 상대만큼 부담스럽고 꼴사나운게 없댔으니 이정도면 딱 좋은 것 같았다. 그런데 김칫국은 웬 김칫국? 류선재는 그냥 정말 은혜 갚을 생각 뿐이었다.

 더디게도 가던 시간은 결국엔 흘러 마침내 약속시간에 도달했다. 그러나 김백경은 오지 않았다. 류선재야 오랜만에 향수를 뿌린 탓에 저번과는 달리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로 만나고 싶어 아무 카페나 골라잡아 얌전히 시간을 죽였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시간만큼 다양한 망상을 하느라 진이 쪽 빨렸다. 날짜도 약속시간도 김백경이 정했기에 그가 늦으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한 십 분까지는 그냥 늦는 거라고 생각했고 이십 분이 지날 무렵에는 자신이 너무 치근덕대는 바람에 부러 바람을 맞춘건지 고민했다. 삼십 분이 지났을 때는 조심스럽게 문자를 한 통 보냈는데 매번 칼같이 답장을 하던 사람이 그건 읽지도 않았다. 사십 분부터는 불운한 상상을 시작했다. 오는 길에 사고가 났다던지... 예를 들면 류선재와 처음 만난 날처럼 가벼운 접촉사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 사고라면 문자에 답장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휴대폰 볼 여유도 없을 정도로 큰 사고라면...? 이건 너무 비약인 것 같기도 했는데 세상사 설마가 사람 잡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때부터는 초 단위로 망상의 나래를 널리 펼쳐갔다.

 

 

 하여튼 그러다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비약을 통한 망상은 한계도 없이 뻗쳐갔고 마침내는 불길한 상상뿐이 없었다. 혹시라도, 류선재가 세운 가설 제 1번에 해당하는 '진짜 존나 바빠서 류선재를 까먹은 경우'를 위해 전화만큼은 하지 않으려 했으나 참기 어려웠다. 마침내 다이얼에 김백경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연결을 하기 직전, 류선재는 카페 창 밖으로 구둣발로 바쁘게 뛰어와 주변을 마구 살피는 익숙한 옆모습을 보았다. 김백경은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쓸어넘긴 뒤 휴대폰을 꺼내들었고 류선재는 전화를 받는 대신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미안해요."

 김백경은 대역죄인이라도 된 꼴이었다. 류선재가 별 반응도 않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그는 답지않게 눈치까지 봤다. 사실 류선재는 별 생각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냥 갖은 망상과 달리 그가 멀쩡하니 됐다고 생각했고, 아예 신경을 안 쓰는건 아니었으나 그건 딱 '흥, 미워잉...' 정도였다. 그냥 나와줬으니 됐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목덜미며 셔츠가 땀으로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유월 초이니만큼 날이 덥지는 않았으나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습했다. 이런 날씨에 뛰어왔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까 대강 쓸어넘겼던 머리는 여전히 흐트러진 채였고 숨소리는 아직도 컸다. 어차피 늦은 거 그냥 걸어와도 됐을텐데 굳이 뛰어온 건 솔직히 좀 기뻤다.

 "됐어요. 그냥... 거울이나 보고 오세요."

 김백경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류선재가 턱짓하는 대로 카페 화장실로 향했다. 그를 대뜸 내쫓은 건 다른 게 아니라 음료를 주문하기 위해서였다. 안그래도 류선재가 커피 사고싶다고 조르는 걸 한사코 거절하던 사람인데 이런 상황에 그의 앞에서 카운터에 갔다가는 카드도 못 꺼내게 할 것 같았다.

 그가 돌아올 무렵에는 마침 주문한 음료도 두 잔 나왔다. 아무리 사람이 없대도 남의 업장에 죽치고 있는게 슬 눈치가 보이던 참이었고 그가 어떤 음료를 좋아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으므로 제철 과일이 들어간 에이드 한 잔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다. 주문을 하면서는 카페 주인이 스몰토크를 시도했는데 사촌이냐는 질문을 받아 기분이 묘해지는 바람에 적당히 얼버무렸다. 자리에 앉은 김백경은 훨씬 멀끔해져 있었다. 그는 테이블에 새 음료가 두 잔, 텅 빈 커피잔 하나가 있는 걸 보고는 류선재의 앞으로 에이드를 밀어줬다. 그리고는 류선재가 말릴 틈도 없이 카운터에서 무언가를 주문했다.

 

 류선재는 김백경이 단숨에 커피를 반쯤 마셔버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왜 늦었어요?"

 

 

 당연히 책망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이유가 궁금했다. 김백경은 민망한 듯 자신의 뒤통수를 몇 번 문지르다가 일 때문이라고 작게 대답했다. 좀 미안하지만 그건 진짜 성의없는 구라였다. 아니, 물론 진짜 일 때문일 수도 있었고 류선재가 생각한 지각의 제 1 사유도 그거긴 했는데 반응이 영 진실이라고 믿기엔 못미더웠다. 그러나 추궁하지는 않았다. 만약에 진짜 류선재와의 약속을 낼름 까먹은거면 마음이 좀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집에 안 가고 기다렸어요."

 "형 보고 싶어서요."

 

 

 그 말을 들은 김백경이나 말을 한 류선재나 마찬가지로 흠칫 놀랐다. 대가리를 거치지 않고 나온 말이었다. 김백경은 그냥 미안함이며 민망함 때문에 한 말 같았는데 거기다 대뜸 '보고 싶어서', 뭐 이딴 대답을 하는 건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좀 장난스럽게 했더라면 분위기가 이렇게 이상해지지는 않았을거다.

 

 

 분위기가 묘한 가운데 카페 주인이 케이크를 내왔다. 웬 놈의 케이크가 여섯 조각이나 됐는데 구석에는 당장이라도 트레이에서 뛰어내릴 것 같은 쿠키도 몇 조각 있었다. 사장은 단아하게 미소지으며 서비스라고 했다. 하긴 진짜 많이 시키기는 했는데... 김백경은 거기다 대꾸도 못하고 여전히 멍하니 있었다. 동성의 고딩에게 듣기에 좀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모양이었다.

 

 

 "아저씨라니까."

 

 

 그러다가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양 빙그레 웃으며 류선재의 손에 포크를 쥐여줬다. 딸기나 초코, 크림치즈, 무화과며 레몬, 체리가 올라간 케이크들은 하나같이 맛있었다. 류선재는 이걸 처음 봤을 때 어떻게 다 먹나 싶어 하나씩 손을 댔으나 둘이 퍼먹는 꼴을 보아하니 다 먹고도 남을 것 같아 그냥 있는 것들을 다 맛봤다. 특별히 맛있는 것들은 슬쩍 그의 앞으로 밀어주니 잘도 먹었다. 아닐 것처럼 생겨서는 상상 이상으로 단 걸 잘 먹었다. 다음에는 커피가 아닌 달달한 라떼나 스무디 같은 걸 먹여봐도 좋을 것 같았다.

 

 

 "근데요."

 

 "음?"

 

 

 김백경은 칠칠맞게 입가에 케이크 가루를 묻히고 있었다. 류선재는 아무 생각 없이 그걸 직접 떼줄 뻔 했다가 냉큼 정신을 차리고 냅킨을 건넸다. 그는 그걸 받아들고 잠깐 얼탔다가 류선재가 자신의 입가를 톡톡 치고 나서야 깨달은 듯 입가를 벅벅 문질렀다.

 

 

 "형은 몇 살이길래 자꾸 아저씨래요?"

 

 "서른... 셋?"

 

 "...진짜요?"

 

 "동안이라는 소리 많이 들어요."

 

 

 방금 입에 케이크 묻히고 먹는 걸 봐서 그런지 뭔지 서른 셋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동안이기는 했다. 류선재도 그를 이십대 후반이나 해봤자 서른 줄이 안됐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디서 동안이라는 소리만 듣지는 않았을 거 같았고... 그가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걸 차치하고도 이 얼굴을 보면 감상하느라 나이 따위는 가늠할 여유도 없을 거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류선재가 되물은 이유는 그런게 아니었다.

 

 

 "불려서 말한 거 아니에요? 자기 나이 기억 못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젊네. 너도 내 나이 되면 알아."

 

 

 아까는 나이에 비해 칠칠맞게 굴더니 이번엔 나이에 비해 꼰대같이 말했다. 류선재는 포크 끝으로 케이크 포장을 깨작대다가 의도치않게 생각하던 걸 입으로 뱉었다.

 

 

 "제 나이에 2 곱하면 형 나이랑 비슷하네요."

 

 

 그러니까 이건 이를테면 직업병 같은 거였다. 류선재는 대한민국의 대입 제도에 갓 낑긴 고딩이었고 하루에도 꽤 많은 시간을 수학에 할애했다. 도로 위 차량 번호판이든 남의 집 주소든 개의치 않고 숫자란 숫자는 죄다 연관성을 찾아댔는데 이건 류선재가 특별히 이상한 게 아니고 그냥 입시의 맛을 본 고딩들은 대개 그랬다.

 

 

 이게 뭐가 문제였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이후로 내내 정적이었다. 아예 정적은 아니었고 류선재는 자꾸 말을 붙였는데 김백경이 계속 단답을 했다. 게다가는 갑자기 케이크에 손도 대지 않았으므로 류선재는 남은 걸 혼자서 다 퍼먹었다. 침묵이 어색한만큼 열심히도 먹었는데 마지막 케이크가 반쯤 남았을때서야 이걸 다 먹으면 그와 헤어져야 한다는 게 생각났다. 그걸 깨닫자마자 입맛이 뚝 떨어졌다. 결국엔 다 마신 에이드나 깨작대다 얼음을 까득까득 씹었는데 그는 그걸 배부른 줄로 안 건지, 아니면 류선재가 일부러 시간을 끄는 걸 안 건지 남은 케이크를 한 입에 털어넣었다. 김백경은 트레이를 착착 겹치고 양 손에 빈 그릇과 잔을 다 몰아쥐고도 류선재가 일어날 기미도 없자 케이크가 가득 찬 입을 우물대며 턱짓했다. 하기는 만남과 헤어짐은 뗄 수 없는 인과였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면서도 엉덩이는 천근만근이었다.

 

 

 류선재는 제 얼굴이 잔뜩 불퉁한 것도 모른 채 반납대로 향하는 김백경의 꽁무니를 쫓았다. 몇 발짝 떨어져서는 바닥 타일의 줄눈을 따라 운동화 옆구리를 비비는데 문득 카페 사장이 조용히 무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사장은 김백경에게 수줍게 휴대폰을 내밀고 있었고 그는 여전히, 하지만 나름대로 티가 나지 않게 턱을 움직이고 있었다. 류선재는 그걸 보자마자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감이 잡혔다. 김백경의 표정은 아주 곤란해보였다. 그 축 늘어뜨린 눈썹이나, 허공을 맴도는 손이나 그런 것들이. 때문에 류선재는 다른 의도 없이 오로지 그를 이 상황에서 빼내주기 위함임을 몇 번이고 되새기며 멋대로 컨셉을 잡았다.

 

 

 "매형, 누나가 언제 오냬요."

 

 

 그리고는 김백경의 등을 떠밀어 카페를 나왔다. 함께 카페 통창 너머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갔을때 그는 입 안에 남은 것을 꿀꺽 소리가 나도록 삼켰다. 케이크가 작은 사이즈도 아닌데 저 쬐그만 얼굴에 달린 입에 무식하게 쑤셔넣을 생각은 왜 한건지 모를 일이었다.

 

 

 "고마워요. 곤란했는데."

 

 

 그는 완전히 깨끗한 자신의 입가를 손 끝으로 몇 번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류선재는 고개나 한번 까딱여 대답을 대신했다. 한참 한산했던 거리는 이제 스믈스믈 사람들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어느새 해가 져가고 있었다. 무리지은 사람들은 저마다 시끄럽게 깔깔 웃었고 상가는 이제서야 하나 둘 문을 열었다. 김백경 또한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말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 데려다줄게요."

 

 

 류선재는 한사코 거절했으나 김백경은 차를 가져오겠다며 거리 한가운데에 류선재를 세워뒀다. 까짓거 같이 가면 좋을 것을, 따라가겠다는 것도 무시하고 산책하던 개를 묶어두듯 가로등 옆에 세워둔 뒤 얌전히 기다리라는 단도리까지 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불퉁한 표정인 류선재의 뒤통수를 한 번 쓰다듬고 가버렸다.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어쩌겠나, 류선재는 거기 목줄이 묶인 것마냥 그가 돌아오길 얌전히 기다려야 했다.

 

 

 머지않아 돌아온 그는 굳이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멍하니 있는 새에 안전벨트까지 매줄 기세기에 류선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재빠르게 벨트를 맸다. 김백경이 이전에 데려다 준 역으로 가면 되겠느냐고 물었고 류선재는 이번에도 고개만 꾸닥여 대답했다.

 

 

 김백경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류선재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이러니까 삐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정말로 그건 아니었다. 아니 뭐 황금같은 주말에까지 일하다 왔으니 은혜 갚겠답시고 귀찮게 하는 고딩 좀 빨리 떼어놓고 싶을 수도 있는거 아니겠는가? 충분히 이해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남은 케이크를 한 입에 꿀떡 먹고싶었을 수도 있는거고. 굳이 뚱하게 있을 필요 없었다.

 

 

 대교의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벌써 길이 막히기 시작했기에 저 멀리 앞 차까지 브레이크등이 번쩍였다. 온 도로가 빨갛고 희고 누랬다. 져가는 햇빛도 한몫했다. 그건 하루종일 하늘이 어두웠던만큼 별볼일 없었다.

 

 

 류선재는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김백경을 살폈다. 그는 도로가 꽉 막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임에도 부자연스러우리만치 앞만 보고있었다. 한 손으로는 핸들을 툭툭 쳤고, 반댓손으로는 무릎 아래를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다리 아파요?"

 

 

 덩치도 산만하고 정장 겉으로 보기에도 근육이 꽉 잡힌 것 같았는데 의외로 내구도가 안 좋은 편인걸까? 하기는 몸이 안 좋아 부러 운동을 해 근육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김백경은 류선재의 시선이 자신의 다리에 닿은 것을 알자마자 곧장 양손으로 핸들을 잡았다.

 

 

 "사고낼 정돈 아니에요."

 

 "아니, 그런 거 때문에 물어본 게 아니라요."

 

 "글쎄... 아까 뛰다가 좀 삐었나?"

 

 "뛴다고 정강이가 나가요?"

 

 "늙으면 다 그래."

 

 

 늙긴? 서른 셋이 이딴 소리 해도 되나? 김백경은 어쩌면 다리를 크게 다쳤던 걸지도 모른다. 부위가 관절이 아닌 뼈인걸 보아하니 부러졌던걸지도. 류선재는 뼈가 부러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체육관에서 건너듣기로는 한 번 부러지면 붙고 나서도 간간이 아프다고 했다. 특히나 비가 오는 둥 날이 습할 때면 더더욱. 김백경은 의외로 칠칠맞은 구석이 있었고 그런 걸 보면 한 번쯤 크게 다쳤을 법도 했다. 그게 아니라 불의의 사고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여튼 그렇다면 이렇게 날이 습할 때면 늘 다리가 아픈걸까?

 

 

 "야, 너..."

 

 

 '야'라는 소리는 처음 듣는 바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류선재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깨달았다. 손 안에 김백경의 허벅지가 그득 차 있었다. 눈으로만 보기에도 몸이 탄탄하다 싶더니 확실히 근육이...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급하게 손을 뗐지만 김백경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류선재는 달리 할 말도 없어서 그냥 죄송하다고 했다.

 

 

 운전하는 사람 다리는 왜 만지냐, 만지길... 애초에 남의 다리를 대뜸 쓰다듬는 꼴도 이상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오묘한 기분이 들었어서 더 그랬다. 당장 이게 정확히 무슨 기분인지를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수 년에 걸쳐 모친 민은주에 의해 형성된 주의 가호가 아직 류선재에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서야 김백경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늦어서 미안했어요."

 

 

 류선재는 미안하다는 소릴 듣고싶지 않았다. 왜인지 그가 미안하다고 할 때마다 마음이 배배 꼬였고 불편했다. 애초 그가 늦은 것에 유감도 없었다. 자신을 만나준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족했다. 뭐 어쩌라는 건가 싶었지만 이제서야 깨닫길, 류선재가 듣고싶던 말은 '기다려줘서 고맙다' 같은 거였다.

 

 

 "미안하면 밥 한 번 사주세요."

 

 

 그래놓고 튀어나온 말은 아픈 다리를 이끌고 약속장소로 뛰어온 사람에게 하기엔 상당히 되바라진 것이었다. 장난스럽게 삐침을 가장한 목소리에 김백경은 푸핫,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요. 맛있는 거 사줘야겠네."

 

 

 류선재는 집에 가는 내내, 집에 도착해서는 밤새 그가 웃었던 순간을 복기했다. 김백경이 웃는 걸 처음 본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그는 의례적인 미소가 습관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진심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을 볼 때면 기분이 오묘해졌다. 명치가 죄이는 것 같기도 했고 숨을 쉬기 어려울만큼 가슴이 답답하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게 되기도 했고... 이런 건 처음 느껴보는거라 거부감이 느껴지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그가 웃던 모습을 자꾸만 다시 보고 싶어졌다.

 

 

 엎드린 채로 베개에 어퍼컷을 몇 번 먹인뒤 팔뚝 사이에 끼고 꽉 조인 채 허공을 마구 발로 찼다. 심장이 졸라 벌렁대서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밥 사달라는 소리가 그렇게 재치있었나? 류선재는 스스로가 유머러스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럴만한 말을 하지도 않았음을 알았다. 그럼 왜 웃었을까.

 

 

 '좀 귀여웠나...?'

 

 

 이건 신장 백팔십 센치를 한참 전에 넘긴데다 각종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으로 꽉 찬 자신에겐 그닥 어울리지 않는 소리 같았다. 게다가는 얼굴도 어디가서 고등학생 같지 않다는 소리를 꽤 들었으므로 귀염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근데 그게 아니면 왜 그렇게 예쁘게 웃냐는 말이다. 사실 예쁘다는 말은, 귀엽단 말이 어울리지 않는 류선재와 마찬가지로 김백경에게도 어울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잘생겼다면 몰라도 애초 김백경은 키도 류선재보다 일, 이센치쯤 더 큰 것 같았고 덩치도 비슷했다. 그니까 어디가서 이런 소리를 했다가는 인지능력을 걱정받을 거였다.

 

 

 그러고보니 키가 빨리 좀 크면 좋을 것 같았다... 류선재는 살면서 단 한번도 키가 빨리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 해봤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이미 키가 백팔십을 찍었기 때문이었다. 키 관련해서는 뒷사람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강제로 뒷자리에 앉아야 할 때 속으로 불평이나 좀 한 게 다였다. 류선재는 늘 또래보다 월등히 컸다. 그런데 김백경은 그런 류선재보다 조금이나마 더 컸다. 안 그래도 나이차 때문에 한참 애새끼로 보일텐데 키까지 작으니 더 할 것 같았다. 고작 몇 센치라도 하여튼 그랬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안 크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아까 김백경이 웃은 게 정말 귀여워서였다면 그냥 더 작아지고 싶었다. 그럼 진짜 대놓고 귀여워해줄 것 같았다. 이왕 연하인거 귀여움까지 받으면 더 좋은 거 아닌가?

 

 

 류선재는 이딴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이 김백경에게 가진 감정이 인간적인 호감이라고 굳게 믿었다. 왜냐면 그정도 잘생긴데다 다정하기까지 한 사람한테는 호감을 안 가지는 게 더 이상했으므로... 그렇기에 자신이 '인간적인 호감'이라고 하기에는 과할 정도로 관심을 표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기시감을 느끼지 못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 미세먼지 가득 낀 날이었다. 류선재는 뭔 놈의 대기상태가 이렇게 후진지 불평을 하면서도 오늘따라 하늘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오늘은 김백경이 저녁을 사주겠다고 한 날이었으므로. 그러니 머릿속이 온통 꽃밭인 것도 당연했다. 덕분에 온종일 멍때리다 처음으로 체육시간에 욕도 먹어봤다. 새롭고 독특한 경험이었다.

 

 

 저녁에 가까운 오후 무렵, 김백경은 류선재를 늘 데려다주던 역으로 마중 나왔다. 그가 예약했다는 곳은 창 밖으로 한강이 보이는 레스토랑이었다. 식사는 코스로 나왔고 하나하나 서빙된 모든 요리가 맛있었던 것도 같다. 사실 너무 긴장해서 맛을 음미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김백경이 사준 밥이 맛없을 수 없었고 애초에 뭔들 김백경과 함께 먹는 거라면 민트초코를 올린 흰쌀밥이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류선재가 생각한 그림은 말 그대로 끼니를 함께 떼우는 거였다. 때문에 복장을 신경쓰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학교 하복을 그대로 입고 온 터였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고요한 분위기에 기념일을 맞은 커플이 득시글대는 유명 호텔의 직영 식당이었다. 게다가 테이블 간 간격도 멀고 칸막이까지 있었기에 거의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었다. 와중에 그 또한 평소와 같은 정장 차림이었기에 류선재가 더 하찮게 보였다. 남들이 보면 조카나 하여튼 친척 동생에게 밥을 사주는 걸로 보일 것 같았는데 그러고보니 스스로의 무신경한 차림새가 더 신경쓰였다. 대체 뭐 어떻게 보이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진짜 무신경한건 김백경이었다. 양식 레스토랑이니만큼 자연히 포크와 스푼의 개수가 한 개는 아니었는데 요리가 나올때마다 류선재가 과거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에 배운 포크와 스푼을 쓰는 순서를 신경쓰는 새 그는 같은 포크와 같은 스푼으로 음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덕분에 류선재도 긴장이 좀 풀려 머릿속에 어설프게 남은 상식을 기억해내 식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여튼 그는 저번에 만났을 적 케이크 여섯 조각을 류선재와 해치웠을 때처럼 참 복스럽게도 먹었다. 남이 밥 먹는 걸 보면서 기분이 좋은 적은 처음이었다. 류선재는 지가 사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여전히 김백경의 기분을 살피는 건 버겁기 그지없었으나 이번에는 대화가 끊기는 법 없이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며 즐겁게 식사를 마무리했다. 유월 말일이니만큼 저녁 시간이 지나서야 해가 슬슬 저물었다. 빠르게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창 밖은 빛을 받은 강물로 마구 번쩍였다. 김백경은 풍경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이전에도 그랬듯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했다.

 

 

 "여기 옆에 강이 예쁜데..."

 

 "그렇구나."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걷다가 가요."

 

 "부모님이 걱정 안하셔?"

 

 "괜찮아요."

 

 

 멀지 않은 곳에 잘 조성된 강변 산책로가 있었다. 어느새 해가 진 초여름의 강가는 미지근한 바람이 부드럽게 불었다. 미세먼지로 뿌옇던 하늘은 어느새 먼지가 낀 것도 분간할 수 없을만큼 어둑했다.

 

 

 사실 한강을 걷자고 말하며 류선재가 상상한 건 단 둘이 조용한 강변을 걷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실로 서울을 가로지르는 강이라는 건 대단해서 한 주의 가운데 낑긴 평일 저녁임에도 밤나들이를 나온 가족들이며 산책하는 연인들, 살기 위해 운동하는 지친 직장인들로 산책로가 온통 득시글댔다.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 알았으면 여기 오자는 소린 안했을 거였다.

 

 

 김백경은 말없이 류선재의 곁을 걸었다. 워낙 사람이 많은 탓에 둘은 거의 손등이 스칠만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스치지는 않았고...

 

 

 김백경은 멍하니 왼편의 강을 응시하며 걸었다. 사람이 한가득이라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텐데도 그랬다. 류선재는 김백경의 옆얼굴만 바라보다 문득 그의 다리 상태가 걱정됐다. 보아하니 당장 다리를 절거나 불편한 낌새는 없었으나 그가 아픈 다리를 만지작대는 걸 이미 한 번 본 이상, 그리고 그게 생각난 이상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그걸 알면서도 겨우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강변을 걷자고 한 스스로의 무신경함이 문제였다.

 

 

 어느 순간 김백경이 홀린 듯 멈춰섰다. 자연스레 류선재가 한 발자국 앞서게 된 바람에 뒤를 돌아봤다. 그는 멀고 깊고 어두운 웅덩이 같은 물을 여전히 응시하고 있었다.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애초부터 오늘은 산책하기 좋은 날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렇게 사람이 북적여서는 주위가 온통 정신이 없었다. 강물마저도 그들 틈으로 손톱만큼씩 보였다. 초저녁의 한강은 사람들이 일상을 나누는 소리로 시끌거렸다. 웃고 떠드는 평화로운 소음과 미지근하게 부는 바람,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풀벌레 울음이며 맑은 흰 가로등 빛 속에서 류선재는 그와 단 둘이 고립된 기분을 느꼈다. 오롯이 남은 것은 잔잔하게 물결치는 검은 강 뿐이었다.

 

 

 "형."

 

 

 김백경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류선재를 마주봤다. 방금 전까지 류선재를 불안하게 했던 표정은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 사라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괜히 왔나봐요. 죄송해요."

 

 "갑자기 왜."

 

 "그냥. 사람도 너무 많고, 날도 너무 흐리고..."

 

 

 말은 끝까지 나오질 못했다. 김백경은 인내심 있게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류선재는 한참 입술만 달싹였다.

 

 

 "이제 가요."

 

 "벌써?"

 

 

 류선재는 그의 손목을 덥썩 잡고 왔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김백경은 얌전히 팔을 내어준 채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김백경이 웬 어린애도 아니고 이렇게 붙잡지 않아도 알아서 잘 걸을테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기엔 바로 몇 발자국 옆이 물가였다. 류선재는 부러 사람들 틈을 헤치고 들어갔다. 온 사방이 사람에 휩싸여 드문드문 보이는 저 까만 웅덩이가 강물인지 하늘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비현실적인 고립감은 여전했다.

 

 

 손 안에 자꾸만 땀이 고이는 것 같았다. 매끄러운 정장 옷감이 축축하게 감겨왔다. 손가락 끝으로 맥박이 느껴졌다. 쿵, 쿵, 쿵 울리는 그게 자신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헷갈렸다. 그건 너무 작은 소리로 약동했다.

 

 

 "야."

 

 

 힘빠진 주먹이 옆구리를 퍽 쳤다. 류선재는 그 자리에 멈춰섰고 김백경은 그 손아귀에서 자신의 손목을 힘주어 빼냈다.

 

 

 "몇 번을 불렀는데 못 들어요?"

 

 "죄송..."

 

 "죄송할 것까지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죄송할 일이 맞긴 했다. 김백경은 잡혔던 손목을 살살 돌리며 스트레칭했는데 그 단정했던 정장 소매가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류선재가 급히 그걸 펴주려 소매를 가로로 잡고 쫙쫙 늘렸는데 외려 모양새만 이상해졌다. 태만 봐도 비싼 거 같았는데 완전 사고친 거였다. 그러나 김백경은 소매를 보고 한번 푸학, 웃더니 류선재의 어깨를 둘러안고 조금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는 코앞에 대교가 펼쳐진 곳에서 멈춰섰다. 도로는 퇴근시간이 지나감에도 여전히 꽉 막혀 있었다. 이곳은 차 소리가 시끄러워서인지 산책하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한적했다. 머지 않은 곳에 제대로 된 공원이 조성된 탓도 있을 거였다. 류선재는 김백경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끌려가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허벅지끼리 스칠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방금 전 인파 속에 숨었을 때와는 달리 바로 앞에 강이 훤하게 펼쳐졌다. 한점 가려지지 않은 검은 강물은 뿌연 거울처럼 대교의 가로등불을 비췄다. 류선재는 그 어둡고 깊은 물을 응시했다. 보고만 있어도 그 안에 발을 담근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고개를 마구 저어 착시를 떨쳐내고 나니 다시 강을 바라보기가 겁났다.

 

 

 "원래는요."

 

 "응?"

 

 "원래는 야경 진짜 예쁜데, 오늘 대기가 안 좋아서..."

 

 "그래?"

 

 "사람도 이렇게 많지는 않거든요?"

 

 "응."

 

 

 김백경은 류선재가 주절주절 주워섬기는 변명에도 하나하나 대꾸해줬다. 그는 어느새 벤치에 완전히 몸을 기대고 있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강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두 눈은 조명이 비춰 은은하게 빛났다. 미지근한 바람은 살살 불때마다 그의 머리카락도 부드럽게 흔들었다. 얼굴이 허여멀개서인지 머리카락 색도 옅었다. 그건 가닥가닥 흔들릴 때마다 조명에 비춰 평소보다 더 연한 갈색으로 보였다.

 

 

 문득 김백경 또한 그렇게 쉽게 빛에 바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땅에 태어난 많은 생물은, 특히나 인간은 빛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음에도 그랬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를 바라보는 것 또한 어려워져 고개를 푹 숙였다. 류선재도 김백경도 한동안 그 정적을 지켰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차가운 손등이 다가와 까슬한 목덜미를 쓸어줬다.

 

 

 "난 강이 이렇게 보기 좋은 줄 몰랐어."

 

 

 보기 좋긴? 류선재는 아까 보았던 김백경의 표정을 똑똑히 기억했다. 당장이라도 뛰어들 듯이 강을 바라봤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부러 허리를 숙여 류선재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는 강을 향해 턱짓했다.

 

 

 그를 따라 다시 본 강은 여전히 깊이를 알 수 없이 어둡기만 했다. 이 강이 생긴 이래 제 발로 물 속에 뛰어든 사람은 몇이나 될까? 분명 셀 수도 없이 많을 거였다. 사람들은 뭐가 좋다고 사람을 집어삼키는 강을 보러오고, 그 강이 보이는 곳에 살기를 바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류선재 또한 전자에 속해 김백경을 이곳으로 데려왔으면서도 그랬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틀어 김백경을 마주봤을 때, 그는 아주 다정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멀리로 오늘의 대기상태를 알리는 전광판이 보였다. 대기 매우나쁨. 류선재는 타고나길 시력이 참 좋았다. 그래서 때로는 보고싶지 않은 것,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볼 때가 종종 있었다. 지금 본 날씨 안내 전광판도 그런 것 중 하나였다.

 

 

 대기는 여전히 후졌고 덕분에 검은 하늘에 별은 커녕 이 땅에서 가장 밝게 보여야 할 인공위성과 달마저 흐렸다. 그 아래 높다란 빌딩과 아파트가 만드는 야경조차도 그랬다. 이쯤이면 저 멀리 보여야 할 남산타워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강은 그 옅은 빛조차 성실하게 반사해 비췄다.

 

 

 다시 자세히 보니 강이 그렇게 검지만은 않았다. 깊이를 알 수 없을만큼 어두운 것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불안을 지우고 보니 평소의 푸르름이 조금은 남아있었다. 물결이 작게 약동할 적마다 비춰진 불빛도 함께 일렁였다. 그러고보니 수면이 꽤 반짝이고 있었다.

 

 

 "고마워요."

 

 

 김백경은 전에 없이 맑게 웃어보였는데 류선재는 어쩐지 그걸 보고있자니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그 순간에, 류선재는 엉뚱하게도 운명에 대해 떠올렸다.

 

 

 다시 말하지만 류선재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삶에 닥치는 모든 고난을 신의 시험 혹은 사탄의 농간질이라 믿고 모든 행복이 신의 은총이자 안배임을 찬양하기엔 류선재에게 믿음이 부재했다.

 

 

 하지만 전지전능한 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망상이 문명의 탄생 이래 21세기 현대까지 끊이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그 비과학적인 창조주를 배제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었다. 창조주의 존재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은 없다. 그러나 중세 이후 현대에 오기까지 천문학과 물리학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며 신의 권위는 한없이 낮아졌다. 논리와 입증은 그들 과학자들이 가장 잘하는 것이었다.

 

 

 류선재는 따지자면 문과였고 논리와 입증은 대한민국 입시 경쟁의 현역으로서 그 텍스트 그대로 머리 속에 박혀있을 뿐이었으나 지금은 신의 실존을 부정하는 근거 한 가지를 제대로 던질 수 있었다.

 

 

 '...성경에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써있지 않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존재한다면 교회에서도 신실하기로 이름난 민 집사에게 아들의 타락이라는 고난을 주진 말아야 했다. 그의 믿음은 수많은 명목을 단 헌금들의 자릿수로 충분히 증명 됐을테니 말이다.

 

 

 류선재는 이 푸른 하늘 아래 붉은 토양을 밟고 살아가는 무력한 미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스스로의 두 다리만으로 세상을 살아나가는 창조자였다. 그러니 류선재가, 스스로 개척한 운명을 통해 새로운 계기를 부여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조금 더 드라마틱하고 요술적인 무언가... 류선재는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도 류선재는 김백경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일주일에 두 번, 그가 아무리 바빠도 이 주에 한 번은 함께 밥을 먹든 커피를 마시든 했다. 김백경이 류선재를 만나줘야 할 핑계는 없었다. 그러나 더이상 류선재가 그런 걸 꾸며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류선재는 불명확했던 감정을 깨달았고 김백경은 류선재가 뭐라든 기꺼이 시간을 내어줬다.

 

 

 그때부터 류선재의 하루 일과는 카운트다운으로 시작했다. 만나기로 한 날까지 닷새, 나흘, 사흘... 일주일은 월화수목금토일이 아닌 오로지 디데이를 기준으로 흘렀다. 약속 당일이 되면 어떤 유혹을 받는대도 점심시간 축구며 농구 같은 걸 다 제꼈다. 체육시간이 껴있는 날은 딱 땀이 나지 않을 정도로만 임했다. 탈취제와 향수는 당연히 들고다녔으나 애매하게 땀냄새가 섞여나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마주치는 사람마다 연애하느냐고 놀려댔지만 기분은 좋았다.

 

 

 와중에는 틈틈이 인터넷에 '16살 연하랑 연애', '연상남 꼬시는 법', '연하 매력어필', '학생 직장인 연애 고충' 같은 걸 검색했다. 우선 첫번째는 모 연예인의 스캔이나 탤런트의 결혼소식 같은 것 밖에 안 나왔고 두번째는 웬 십 년쯤 전에 작성된 고전 스킬인지 뭔지만 나와서 때려쳤다. 그나마 건질만한 게 있는 건 세번째였다. 어디서는 좀 귀엽게 보여야 한댔고 다른데서는 너무 애새끼같으면 연애상대로 보이지 않는댔는데 류선재의 연애경력 대부분은 연상이 상대였으니 적당한 중간을 찾는 건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때부터 류선재는 김백경과 평일에 약속을 잡을때면 무조건 사복을 챙겨다녔다. 교복이 귀여워보인다면 잘 때도 교복만 입고 잘거였는데, 괜히 고딩 티 팍팍 냈다가 애새끼로만 보이는 것만큼 마이너스도 없었으므로 안전빵으로 선택한 거였다. 그리고 네번째로 검색한 건 그냥 머릿속에서 지웠다. 웬 남의 경험담만 잔뜩 봤는데 결말은 다 헤어지는 거였다. 개중에 한 게시글에 달린 '이래서 연하 만나는 거 아니'라는 댓글이 존나 인상적이었다...

 

 

 "...요즘 학교는 사복 안 잡나?"

 

 "음."

 

 

 류선재는 대답을 얼버무리고 쪼로록 소리가 나도록 커피를 빨아마셨다. 다행히 김백경도 더 캐묻지 않고 눈앞의 조각 케이크를 잘라먹는데에 집중했다. 얼마 전에야 알게 된건데, 김백경은 놀라우리만치 취향이라는 게 없었다. 식사는 물론 커피나 디저트에조차 그랬다. 습관적으로 아메리카노를 시키기는 했지만 막상 녹차라떼나 망고스무디 같은 걸 쥐여주면 그건 그거대로 참 잘 먹었다. 디저트 또한 혀가 마비될 것 같은 초콜릿 케이크부터 웬 민트초코 머핀까지 가리지 않았다. 다른 것보다 단 걸 조금 더 잘 먹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 외에는 어림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러고보면 류선재는 김백경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마저도 그가 직접 말해준 것은 나이 외에는 전무했고 대부분 류선재가 이런 식으로 관찰한 거였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고 대화는 늘 류선재의 일방적인 티엠아이 방출 혹은 시답잖은 말장난이 전부였다. 그러니 그의 직업이나 가족관계, 취미와 같은 대화하다보면 자연히 알게될만한 것도 모르는 게 당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류선재는 김백경의 집 숟가락 갯수까지 궁금했다...

 

 

 "근데요, 형."

 

 "형 아니라 아저씨."

 

 "형은 무슨 일 해요?"

 

 

 맹세코 다른 의도는 없었다. 조금 변명을 하자면, 류선재 자신은 아니라고 믿었으나 실제로 그는 세상사에 너무 순진해빠진 한낱 고등학생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김백경이 나이에 비해 비싼 차를 끌고, 비싼 시계를 차고, 비싼 정장을 차려입고 밤마다 출근하는 것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류선재 또한 흔히 밤일이라고도 하는 직업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으나 다시 말하지만 류선재는 어리고 순진했다. 적어도 스스로가 자신이 생각하기에 추잡하고 경멸스러운 직업을 가진 남자에게 끌리고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할만큼은 그랬다.

 

 

 그러나 인생은 상상한 대로만 돌아가지 않기에 아름다운 법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개 헛소리다.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만 상상할 수 없기에 존나 잔인한 거였다. 류선재는 텅 빈 앞자리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뭔 놈의 성격이 저렇지. '무슨 일할 거 같은데?' '밤에 출근하는 일이 다 뻔하지 않나?' 웃는 낯으로 쏟아내는 공격적인 말투에 류선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는 어느새 미소마저 지웠다. '도련님으로 커서 이런거 잘 모르나보네. 실망했어?'

 

 

 그는 쉼없이 쏘아붙이다 류선재가 무어라 한 마디 꺼내기도 전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다며 자리를 떠버렸다. 류선재는 반도 비워지지 않은 커피 두 잔을 앞에 두고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았다.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은 무슨... 성격이 뭐 저러냐는 정말 순수한 의문 뿐이었다.

 

 

 애초 뭐라고 할 생각도 없었지만 실망했느냐면, 솔직히 말해서 놀란 건 사실이었다. 김백경의 말마따나 류선재는 부정할 수 없이 곱게 큰 도련님이 맞다. 가정적인 경찰 간부 아버지와 화목한 집안을 일구는 친정이 부유한 어머니 아래서 상식과 비상식,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선명히 그으며 험한 꼴 한 번 본 적 없이 커왔다. 살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모두 류선재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으므로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연민은 쉬우나 공감과 이해는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류선재는 김백경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선을 그어야 했다. 류선재가 뭐라고, 먹여살려줄 것도 아니면서 타인의 생계 수단에 훈수를 둘 수 있겠는가? 류선재는 옳고 그름에 선명한 경계가 있다고 믿으면서도 김백경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그는 '그름'의 선 안에 있는 이들을 분명히 혐오하면서도 타인을 판단해 속단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임은 알았다.

 

 

 하여튼 류선재는 한참을 그 자리에 망부석마냥 앉아있다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온 몸에 힘이 빠져 씻고 옷을 갈아입을 기운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침대에 드러눕고 싶었는데 그건 류선재의 청결수칙이 절대 허용하지 않는 것 중 하나였으므로 그냥 바닥에 드러눕는 걸로 합의했다. 맨바닥에 누워서는 화면도 켜지 않은 휴대폰만 만지작댔다. 전화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간 사람한테 함부로 전화하는 것만큼 무신경한 행동도 없는 것 같아 때려쳤다.

 

 

 대신 문자를 남겼다. 솔직히 자신이 어떤 잘못을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김백경은 화가 난 듯 보였으니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MMS 길이의 텍스트를 적어내렸다가 중간쯤에 전부 다 지워버렸다. 괜히 말을 길게 했다가는 뭘 잘못한지도 모른 채 사과하는 게 티가 날 것 같았다. 사실 류선재는 김백경과 대화를 좀 하고 싶었다. 뭘 잘못했는지 그의 입으로 듣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다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진 않을 거였다. 하지만 짧지만은 않은 시간동안 류선재가 봐온 바, 김백경은 그런 이야기를 해줄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진득하게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다가는 역효과만 날 것 같았다. 이를테면 읽씹이라든지, 안읽씹이라든지...

 

 

 류선재는 김백경이 작정하고 잠수를 타버리면 그를 찾아낼 방법이 없었다. 뭔들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찾든 말든 할 일인데 그게 또 작금의 사태를 일으킨 원인과 맞물렸다. 결국 류선재가 선택한건 그냥 사과만 하는 거였다. 모르긴 몰라도 먼저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는 건 자명했다.

 

 

 [죄송해요.] 전송됨

 

 

 그리고 한 시간쯤 휴대폰만 붙잡고 답장을 기다렸다. 그 이후에는 읽음 표시라도 간절히 바랐다. 류선재가 그린 최악의 시나리오는 안읽씹 당하는 거였다. 읽씹이라도 하면 차단이라도 안 당했겠거니 안심이라도 하겠는데 안읽씹은 진짜 바빠서 못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줄기 희망을 못 놓게 했다. 설마 그 일로 차단까지 했겠나 싶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였다... 설마가 사람잡는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문자창을 띄운 화면은 동이 틀 무렵까지 미동도 없었다. 마지막 내역이 류선재가 밤중에 보낸 사과였고 읽음 표시는 여전히 뜨지 않았다. 몇 시에 연락하든 칼같이 답장을 하던 사람이 해 뜰 때까지 문자를 읽지도 않는다는 건 안읽씹이든 차단이든 무조건 둘 중 하나였다...

 

 

 눈 밑이 퀭한 채 터덜터덜 등교하자마자 곧장 책상 위로 엎어졌다. 졸려서 엎드린 건 아니고 그냥 기운이 없어서 그랬다. 애초에 잠도 안 왔다. 온종일 무기력하게 있자니 이번엔 마주치는 사람마다 여친이랑 싸웠느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듣고보니 뭐부터 부정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일단 여자가 아닌데, 하여튼 사귀느냐면 그것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싸운 것조차 아니고 그냥 류선재가 일방적으로 말로 후드려맞았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입맛도 뚝 떨어져서 처음으로 점심도 걸렀다.

 

 

 대신 온종일 휴대폰만 들여다봤다. 지문으로 잠금을 풀고 문자창을 들여다보는 겨우 몇 초 동안에도 매번 무의식 중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찾았다. 신은 믿지도 않았고 때때로는 신성모독이나 다름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렇게 간절할 때면 어머니의 세뇌 덕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기도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이쯤되니 어머니의 헌금과 기도빨이 떨어진건가 싶어져 오랜만에 교회에 가봐야 할지까지 고민했다.

 

 

 다행히도 류선재가 교회까지 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학교가 마쳤음에도 집까지 갈 기력이 나질 않아 운동장 한 켠에 널브러져 있던 중, 마침내 류선재의 휴대폰이 큰 소리로 진동했다. 양 손으로 고이 쥐고 있던 휴대폰의 화면을 켜기까지 이게 스팸문자만은 아니기를 어찌나 간절히 빌었는지 모르겠다.

 

 

 류선재는 누운 자리에서 그에게서 온 답장을 두 번 읽어봤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앉아 한 번 더 읽었고 그 다음에는 아예 일어나 가방만 겨우 들쳐매고 교문 밖으로 마구 뛰쳐나갔다.

 

 

 시간대가 애매한 탓에 한적한 지하철 역전에 익숙한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마찬가지로 익숙한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형."

 

 

 눈이 마주친 그는 평소대로 깔쌈한 차림이었는데 얼굴은 온통 퀭한게 눈 밑이 새카맸다. 류선재는 김백경을 부르기 직전까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를 상상했다. 답장을 얼마나 기다렸는지를 책망해야할지, 일단 잘못했다고 빌어야할지,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했다고 해야할지, 혹은 문자에 담지 못한 구구절절한 변명을 주워섬겨야할지 머리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자신과 한치 다를 것 없는 그의 몰골을 보자마자 머릿속이 백짓장이 됐다. 김백경은 어색하게 웃다가 스스로의 거칠한 뺨을 몇 번 문질렀다.

 

 

 "야자 안 해? 이렇게 나와도 되나."

 

 

 대뜸 타박이나 들었지만 류선재는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다정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걸 깨닫자마자 온 마음이 눈 녹듯 사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슬쩍 다가가 머리통을 어깨에 기대자 김백경은 빼지않고 그걸 받아줬다.

 

 

 "저 배고파요."

 

 "학교에서 굶겨요?"

 

 "그냥, 학교 밥 맛없어서요."

 

 

 하하, 웃는 소리와 함께 기댄 어깨가 작게 진동했다. 사실 이건 구라다. 류선재가 다니는 사립 고등학교는 남고로 시작해 공학으로 전환된지 얼마 안 된 곳으로, 혈기왕성한 천여 명의 남학생들의 일일 칼로리 소모량을 감당하기 위한 특출난 식단으로 악명이 높았다. 공학으로 전환되면서도 그 전통은 지켜졌고 덕분에 신입생이 교복을 넉넉히 맞추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또한 급식의 전투력이 높은만큼 급식런의 경쟁력도 대단했는데 그 중에도 류선재는 늘 top3의 성적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 방금 한 말을 늘 복스럽게도 먹는다며 예뻐하시던 급식실 여사님들이 들으셨다면 참으로 섭섭해하실 거였다...

 

 

 "반찬투정하면 안되지."

 

 "맛있는 거 사주세요..."

 

 

 어느새 김백경의 표정 또한 완전히 풀어져있었다. 피곤에 절어있는 얼굴이 어떻게 되지는 않았지만 미소는 평소와 비슷했다. 그는 어리광이 그득 담긴 소리에도 아무 말 않고 류선재의 정수리나 북북 쓰다듬어주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둘 다 이전의 사태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으나 류선재는 어렴풋하게 그가 미안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김백경은 운전하면서도 내내 류선재를 흘끗댔고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류선재가 시답잖은 이야기를 꺼내면 다정하게 반응했다.

 

 

 김백경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대개는 너그러웠으나 어떤 때에는 이해할 수 없을만큼 예민했다.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건 류선재 뿐이었으므로 그때마다 애를 태우는 것도 류선재였지만 어쩔 줄을 모르고 절절매고 있으면 김백경은 어느새 혼자 진정이 되어 되려 류선재의 기분을 살피거나 했다.

 

 

 그때마다 류선재는 그와 자신 사이에 원인을 알 수 없이 벌어진 간극을 느꼈다. 그건 꽤 깊고 넓어서 이딴 식으로 근본적인 해결 없이 덮어만 놓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류선재는 이를 잘 알았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란 이제 겨우 열일곱 먹은 곱게 큰 도련님이 쉽게 깨우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김백경은 이를 잘 알았다. 김백경은 원인 또한 알고 있었다. 그에게 또한 원인이 명시적이지는 않았으나 무의식중에는 분명하게 류선재와 자신 사이의 선을 인지했다. 그는 류선재가 의문을 가졌음을 뻔히 알면서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건 단순히 류선재가 나이를 먹거나 경험을 쌓으며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고난 환경이, 그것이 불변하리라 믿을 수 있는 견고함이 만들어낸 경계는 타인의 몰이해가 허물 수 없는 거였다.

 

 

 그러나 류선재는 당장 중요한 건 그 간극이 아니라고 믿었다. 류선재는 타인을 이해하는 법은 몰랐으나 적어도 사랑하는 법은 알았다. 그는 어떤, 드라마틱하고 요술적인 사랑의 실존을 믿었다. 실존하는 모든 것에는 힘이 있었고 실제로도 이해의 모든 첫 걸음이 그로부터 이루어지니 아예 글러먹은 생각도 아니긴 했다.

 

 

 이 문제는 아직 그 정도로 타협할 수 있었다. 류선재는 어렸고 김백경은 그걸 감안해 꽤 봐줬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상호타협 따위로 덮어놓을 수 없는 문제도 있는 법이었다. 대표적으로는 둘의 입장차이가 그랬다. 류선재는 갓 열일곱 먹은 고딩이었으나 김백경은 서른 셋 먹은 사회인이었다. 그리고 서른 중반에 돌입하는 이에게 결혼 얘기는 떼놓을 수 없는 종양같은 거였다. 물론 종양같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류선재 개인의 극단적 의견이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애시당초 그를 볼때부터 여자친구가 없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직업을 안 뒤에는 여자친구는 아니더라도 준 여자친구는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왜, 세간에는 프렌즈 위드 베네핏인가 뭔가 그런것도 있었고 하여튼 김백경 같은 남자가 아무도 만나고 있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어려웠다.

 

 

 때문에 어느날은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를 슬쩍 물었다. 김백경은 알바생의 사심만큼 휘핑이 올라간 프라푸치노를 먹고 있었는데 입가에 코코아 가루를 잔뜩 묻힌 채로 '있을까, 없을까?' 이딴 대답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진짜 바보처럼 보였는데 이게 또 반전매력... 귀여움 포인트로도 어필이 됐다. 잘생겼고 멋있는데 귀엽고 성질머리가 더러웠다가 다정했다가, 이렇게 없는 매력이 없는 사람한테 뻑가는 놈들이 한둘은 아닐 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침울해졌다. 이전에 검색했던 '학생 직장인 연애 고충' 키워드에 걸린 게시글 하나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직장에 나잇대 비슷한 멋있는 사회인이 널렸는데 굳이 애새끼 만날 이유가 없다는... 이 글은 처음 봤을 때부터 그냥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했는데 꼭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간의 정적이 지나고, 김백경은 류선재가 건넨 넵킨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으면서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말했다. '만나는 사람 없어요.' 그 순간에 카운터에 울리던 배달어플 주문알림과 키오스크 소음까지 선명히 기억한다. 그 한 마디를 몇 번이나 곱씹었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류선재는 그가 만나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기뻐했다가, 자신 또한 그 안에 카운트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슬퍼하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곧 슬픔은 극복했다. 만난 게 몇 번이나 된다고, 나이 차이도 이렇게 나니 그의 마음을 얻는 게 쉬울 리 없었다. 그러니 마음을 여유롭게 하고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어느날 김백경은 대뜸 왕복 6차선이 코앞인 대로변으로 류선재를 불러낸거다.

 

 

 그가 먼저 류선재를 부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늘 먼저 연락하는 건 류선재였고 약속을 잡자고 조르는 것도 류선재였다. 어느 평일, 갑자기 [잠깐 만나자] 는 문자를 받은 류선재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곧장 그가 말한 장소로 뛰쳐갔다. 무슨 일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으나 어렴풋이, 요새 별 일 없었으니 나쁜 일은 아니겠거니 생각했을 뿐이다.

 

 

 저 멀리 사거리 교차로가 보이는 곳에서 김백경은 줄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발치에 담배꽁초가 한가득이었는데 류선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장초를 뚝 꺾어버렸다. 김백경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이번을 포함해 몇 번 본 적 없었지만 상당한 꼴초인 모양이었다. 잔소리를 해도 될지, 주변에 꽁초를 모아다 버릴만한 쓰레기통이 있는지를 생각하던 중 김백경은 인사도 없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어디 아픈 덴 없어요?'

 

 

 아프긴? 류선재는 타고나길 튼튼하게 태어나 그 흔한 잔병치레조차 없이 컸다. 게다가 최근엔 김백경과의 관계도 좀 안정돼 속 썩을 일이 없어 밥도 잘 먹었고 잠도 잘 잤다. 가끔 뭐시기한 꿈을 꾸는 일이 있기는 했는데 이건 김백경에게 할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하여튼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류선재가 멍하니 서있기만 하자 김백경은 턱짓으로 류선재의 허벅지를 가리켰다. 류선재는 그제서야 그가 물은 게 거진 반 년 전 교통사고 상해부위에 관한 것임을 깨달았다. 허벅지가 멀쩡하다는 얘기는 이미 그와 처음 문자를 나눌 적에 한 열 번 정도 했다. 멍청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있자니 또 맥락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이제 공부에 집중해야지.'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가 절로 갸우뚱 기울어졌다. 김백경은 갑자기 꼰대같은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사실 연설이랄것까지는 없었고, 그냥 뭐 지금 시기에는 다른 데에 한눈팔게 아니고 학교생활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먼 친척이 명절마다 하는 잔소리 비슷한 거였다. 그런데 한눈은 이미 팔았고 하여튼 학교생활은 나름 충실히 하고 있었으니 귀기울여 들을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겨우 이게 갑자기 불러내서 할 소리란 말인가? 물론 불만은 없었고 오히려 그가 이렇게 갑자기 불러냈다는 사실은 기쁘기까지 했다. 하지만 김백경의 성격에 이런 말만 하려고 부른 건 아닐거였다. 이쯤 생각이 뻗쳤을 때서야 류선재는 직감적으로 김백경이 꺼낼 본론이 무엇일지를 눈치챘다.

 

 

 '앞으로 연락하지 마.'

 

 

 거기서부터 총체적 난국이었다. 류선재는 헤어지자고요? 따위의 헛소리를 해버렸고, 싫니 좋니 하는 같잖은 말싸움 끝에 고백한 뒤 머리에 열이 오른 바람에 대뜸 뽀뽀까지 해버렸다. 종래에는 그 커다란 왕복 6차선 도로 앞에 홀로 남겨졌다.

 

 

 그게 끝이다.

 

 

 그 일이 벌써 일주일 전이다. 질질 짤만큼 짠 것 같았는데 그 날 일을 떠올리면 눈물이 끝도 없이 뚝뚝 떨어졌다. 일주일 내내 밤새 엎어져 울었으니 당연하게도 류선재는 매일 퉁퉁 부은 눈으로 등교했다. 이제는 아예 전교에 류선재가 여친과 헤어졌다는 소문이 퍼졌다. 당연히 소문의 장본인 귀에도 그 이야기가 들려왔는데 이걸 또 어디부터 부정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상해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류선재와 각종 점심시간 식후 스포츠로 우정을 다졌던 친구들은 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느냐며 말만 하면 원하는 스타일로 여소를 시켜주겠다고 달랬으나 류선재는 정말로, 그런 건 필요 없었다.

 

 

 생각해보면 유치원에 다닐 적부터 쉴틈없이 여자친구를 사귀어 왔다. 아주 어릴 적을 제외하면 연애기간도 늘 짧지 않았다. 류선재는 가벼운 관계를 싫어했고 따라서 '사귄다'고 정의할만한 상대에게는 늘 최선을 다했다. 물론 그 최선때문에 다 차이긴 했는데... 하여튼 단 한 번도 가벼운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하지만 류선재가 김백경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닌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애초 그 초여름의 한강에서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든 생각은 오롯하게 사랑 뿐이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다 망한 마당에 이런 생각은 하등 쓸모 없었다. 하지만 류선재의 머리통은 온통 김백경에 대한 생각 뿐이었고 그건 지울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한다고 느낀 순간부터 삶이 그를 기준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는데 이제와서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쉬울 리 없었다.

 

 

 그냥 다 후회됐다. 그 날 한강에 가자는 소리는 왜 했을까? 거길 가지만 않았어도 문득 그를 사랑한다는 걸 깨달을 일은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이지 그와 밥만 먹고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쉬웠다. 하필 코앞이 한강이었잖은가. 식당에서조차 강의 전경이 훤히 보였으니 그곳에 간 건 불가항력과 같았다.

 

 

 진짜 문제는 별 것도 아닌 일로 밥 사달라는 소리나 한 거였다. 그가 바쁜 사람인 걸 뻔히 알면서도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는 괜한 이기심을 부린 것 말이다. 그러나 그때는 정말 간절했다. 이전, 김백경은 그저 적선하듯 베풀었을 호의에 굳이 커피를 사고 싶다는 어거지를 부렸던 순간처럼...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다시는 김백경을 볼 일도 없었을 테다.

 

 

 하지만 우연히 그를 만난 순간부터, 아니 처음부터 류선재는 이 모든 게 기회 같았다. 동시에 운명이라고 믿고 싶었다. 모두 우연이었고 스스로 운명을 믿지 않는다고 자부했음에도 그랬다. 모든 일은 그저 순리에 따랐을 뿐이다. 류선재가 진정 후회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를 처음 만난 날부터 결말이 이 꼬라지일 걸 알았대도 다른 선택을 하진 않았을 거였다.

 

 

 초여름의 그 날과 달리 이제는 어느덧 맑은 가을바람이 불었다. 한강은 여전히 잔잔히 흘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물은 이전에 보았던 것보다 푸른 것 같기도 했고 검은 것 같기도 했다. 오늘은 이전에 김백경과 함께 왔던 날과 마찬가지로 일주일의 가운데 낑긴 평일이었고 이르게 해가 진 저녁시간이었음에도 이곳을 거니는 사람은 그 때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류선재는 산책로를 넘어 강둑 흙길에 가 주저앉았다. 이곳에서는 누군가 웃고 떠드는 소리보다 풀벌레 울음이 더 컸다. 고요한 가운데 귀를 기울이면 강물이 넘실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강 저편으로 환히 불이 켜진 건물은 어찌나 많은지 강물은 반짝반짝 빛났다. 멀리로는 남산타워까지 훤히 보였다. 오늘따라 야경이 참 예뻤다. 저번엔 미세먼지가 그렇게 득실대더니 지금은 날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그걸 멍하니 보고있자니 어느새 빛이 자꾸 번져보였다. 날씨는 아직 미지근함에도 뺨에 닿는 바람이 너무 차게 느껴진다 싶더니, 그게 다 온 뺨이 축축하게 젖은 탓이었다. 손수건을 꺼낼 마음도 들지 않아 소매로 벅벅 문지르고 나니 눈가가 온통 따가웠다.

 

 

 사실 김백경과 같이 보고싶던 건 이런 풍경이었다. 하늘의 별은 까마득히 흐리게만 보이는 이 서울바닥에서, 별만큼 아름다울 수는 없더라도 밝게 빛나는 세상을 함께 보고 싶었다. 더 화려하고 빛나는 것들을 봤을 그에게는 같잖고 하찮을지라도 자신이 아는 한 두 번째로 아름다운 걸 보여주고 싶었다. 첫 번째는 당연히 김백경이었는데 그렇다고 거울을 보여줄 순 없잖은가... 게다가 그때는 김백경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모르던 때였다.

 

 

 김백경은 때때로 아주 무기력하고 공허하게 보였다. 류선재는 그런 그를 볼 때마다 할 수만 있다면 그가 가진 감정을 나눠갖고 싶었다. 그게 얼마나 오래된 진득한 감정인지 함부로 짐작할 수도 없었고, 그렇기에 자신이 가져갈 수만 있다면 오롯이 감내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둘은 타인이었다. 그러나 류선재는 그가 티없이 맑은 시선으로 강물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러고 싶었다. 이건 둘이 온전한 타인이기에 가질 수 있는 이기심이었고 바람이기었다. 그렇기에 그 자체로 기쁨이 될 수 있을 것 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그의 허락이 필수였고 류선재는 이미 거절당한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하고싶은 건 많았는데 세상에는 사회적 명예라는 게 존재했다. 이 사회적 명예는 물론 김백경의 입장 얘기다. 그러니 류선재가 뭘 어쩌고 싶든 하면 안되는 거였다. 이제 류선재가 해야하는 건 얼마가 걸리든 김백경에 대해 잊는 거였다. 류선재는 아직 어렸다. 시간도 많았다. 산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길었다. 그 아주 길고도 긴 시간을 그를 사랑하는 데에 쓸 수 있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을 텐데. 하지만 김백경의 앞에서 사랑이란 소리를 입에 담아놓고 그를 곤란하게 할 만한 행동을 하는 건 한 입으로 두말 하는거나 다름없다.

 

 

 조급하게 마음먹을 필요도 없다. 정말로, 시간은 많았고 그 동안도 사람은 숨만 쉬면 살아갈 수 있으니. 하지만 세상사에 아직 무지하고 순진한 류선재도 잘 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사람을 살려놓는 것과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의 차이, 그 간극을 벌려놓은 것의 이름을...

 

 

 밤하늘보다 빛나는 서울의 야경, 그 야경을 흐린 거울처럼 비추는 이 아름다운 강과, 인간의 오감 중 유일하게 빛나는 은혜를 받은 두 눈에 이 모든 것을 담으러 온 사람들... 류선재는 그 틈에서 홀로 누워있다가 사위가 고요해졌을 때서야 몸을 일으켰다. 소금물을 줄줄 짠 두 눈꺼풀은 너무 무거웠고 온 몸은 피로에 절었다. 눈물 짜는 것도 기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는 걸 류선재는 뒤늦게 깨달았다.

 

 

 휴대폰을 들여다보고서야 벌써 새벽이 깊었다는 걸 알았다. 여기저기서 연락이 와 있었지만 그 중 기다리던 이는 없었다. 하긴 이제 기다리니 어쩌니 할 상황도 아니었다. 시간이 시간이니 대중교통은 싹 끊겼을거고 집에 돌아가려면 택시를 잡아야 했다. 야간할증이 붙으려나? 류선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강둑을 벗어나지 않았다. 발걸음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을만큼 지쳤으나 명치가 아직도 답답했다. 그러고 있자니 또 눈물이 줄줄 나왔다. 오늘치는 다 짠 줄 알았는데 사람 몸은 70퍼센트가 수분이라는 게 구라는 아닌 모양이었다.

 

 

 한적한 강변은 멍하니 걷기에 좋았다. 류선재가 이렇게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머릿속이 멍하니 눈물도 이젠 드문드문 나왔다. 그런데 이렇게 눈물이 그쳐가는 걸 자각하자마자 또 울음이 팍 터졌다.

 

 

 "허엉..."

 

 

 열일곱 먹은 놈이 내기엔 진짜 추한 소리였다. 근데 존나 서러운데 어떡하란 말인가. 류선재는 자제도 못하고 숨 넘어가게 꺽꺽댔다. 숨 딸려서 헉헉대는 건 덤이었다. 그런 와중에 흐린 시야로 어둑한 저편에 커다란 덩치 하나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아무리 시간이 늦었대도 이곳은 서울의 중심을 차지한 강이었다. 사람이 아예 없는 게 더 이상했다. 이제서야 쪽팔린 마음이 들어 뺨을 박박 문질러 닦고 나니 시야가 선명해졌다. 방금 류선재가 질질 짜는 소리를 듣고 몸을 움츠린 이는 익숙한 뒷모습을 하고 있었다. 덩치가 덩치라 움츠린다고 눈에 안 띄는 것도 아니었다.

 

 

 류선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코를 몇 번 훌쩍였다. 그러고도 자꾸 줄줄 새는 바람에 드디어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가 상대 또한 마찬가지로 작게 훌쩍인 것을 듣고 그걸 그냥 손에 꽉 쥐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 보니 그 인영이 훨씬 정확하게 보였다. 산책로로 조성된 곳보다 물가에 가까워 가로등 빛도 거의 닿질 않았으나 류선재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이 늦은 시간에도 빳빳한 정장차림에 짙은 향수냄새를 풍기는 그는 김백경이었다.

 

 

 바람이 쏴 불었다. 불어터진 눈두덩이며 두 뺨이 시원하게 식었다.

 

 

 "여기서, 큼. 여기서 뭐해요."

 

 

 목이 완전히 갈라지는 바람에 처음 한 말은 거의 바람소리처럼 나왔다. 하지만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으므로 김백경이 류선재의 말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만무했는데 그는 꺼먼 강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돌아보지도 않았다. 류선재는 김백경을 한 번 더 부르는 대신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까처럼 훌쩍대는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지만 류선재는 손에 꽉 쥐고있던 손수건을 건넸다. 그가 그걸 받지 않아도 손을 거두지 않았다. 김백경은 절대 받지 않을 것처럼 본 척도 않더니 힘이 빠진 류선재의 팔이 푹 꺾이자 끝내는 그걸 가져갔다. 그리고는 오래도록 정적이었다.

 

 

 둘은 빛을 등지고 있었지만 대교의 수많은 가로등불을 반사하는 강물이 코 앞이었다. 류선재는 김백경과 마찬가지로 흐르는 강물만을 응시했다. 아직 그의 얼굴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른 건 아니고 눈이 존나 부었을텐데 그게 좀 많이 못생겼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김백경은 손수건을 받고도 한참동안 꿈쩍도 않더니 어느 순간에 대뜸 손수건으로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우악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손수건이 부드럽대도 저런 식이면 얼굴이 다 긁힐 거였다. 경악한 류선재가 손수건을 낚아채갔지만 얼굴은 이미 불그스름했다. 아니, 정확히는 한쪽 뺨만 그랬다. 더 정확히는 손수건에 긁힌 게 아니라 누구한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얼굴 왜 이래요? 누가 그랬어요?"

 

 

 김백경은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 자신의 뺨을 대충 쓸어만졌는데 그 왼손 약지가 텅 비어있었다. 원래도 그의 약지는 비어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만난 날 결혼한다느니 했던 사람 손이 비어있는 건 이상했다. 게다가 이렇게 발그스름할만큼만 부은 걸 보니 상대가 손 힘이 그리 세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류선재는 이 두 개의 증거를 토대로 한 가지 가설을 만들었다. 솔직히 사심도 좀 있었다.

 

 

 "그 분이랑 싸웠어요?"

 

 

 '그 분'이라는 지칭은 누굴 가리키는지 애매했지만 둘 다 그게 누군지 명확히 알았다. 류선재는 나름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김백경은 오늘 점심에 뭘 먹었는지 말하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파혼했어."

 

 

 바람이 또 쏴아 불었다. 가을 바람이 꽤 차가웠다. 그만큼 하늘은 맑았고 자세히 보면 별도 꽤 많이 보였다.

 

 

 "죄송해요. 그런, 그렇게 된 줄은 몰랐어요."

 

 "됐어. 연애결혼도 아니었고 차라리..."

 

 

 그는 말끝을 흐렸지만 류선재는 그 뒤에 왔을 말이 들린 듯 했다. 김백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돌린 채 먼 곳을 응시했다. 말실수 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류선재는 그제서야 아까부터 그에게 묻고싶었던 말을 뱉었다.

 

 

 "여기 왜 왔어요?"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류선재는 답을 알 것 같았다.

 

 

 "제 생각나서 왔어요?"

 

 

 류선재는 시간이 많았다. 산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길었다. 그 아주 길고도 긴 시간을 그를 사랑하는 데에 쓸 수 있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을 거였다. 그리고 그 길고도 긴 시간동안 단 한 순간, 단 한줌이라도 비슷한 무언가를 받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 세월은 온통 행복으로 가득할 것이다. 때로는 지나간 한 순간만으로도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사람이었으니.

 

 

 둘은 한참동안 야경을 지켜봤다. 시간이 늦어갈수록 건물의 빛은 하나 둘 꺼져갔으나 그렇기에 하늘의 별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김백경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였지만 어느새 그 또한 먼 곳의 하늘을 보고 있었다.

 

 

 류선재의 한 손에는 축축한 손수건이 들려있었고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그러나 그건 김백경도 마찬가지였다. 벌건 자국이 남은 뺨의 반대쪽 평소보다도 더 창백했다. 류선재는 홀린듯 창백한 뺨을 자신의 따듯한 손바닥으로 감쌌다. 살갗이 너무 차가웠다. 너무 차가워서 자신의 열 오른 뺨을 가져다 대 덥혀주고 싶었다. 입술이 마주닿은 건 부가적인 것이었다. 그 순간 김백경이 양 어깨를 잡고 밀쳐냈지만 손에 힘이 다 빠져있었다.

 

 

 다시 입술이 맞닿았을 때는 어깨를 붙잡은 손이 되려 애정어린 스킨십처럼 느껴졌다. 서로 다를 것 하나 없이 입술이 바싹 말라 거칠었지만 류선재는 그와 닿은 순간부터 입 안에 달큰한 침이 고이는 것 같았다. 쿵쿵 울리는 소리가 머리까지 울리도록 가슴이 세차게 고동쳤다. 입을 살짝 벌려 김백경의 아랫입술을 깨물자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지만 류선재는 애초 입을 맞췄을 때부터 뽀뽀따위나 하고 떨어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열린 틈으로 혀를 밀어넣고 잇새를 살살 핥자 허락하듯 턱이 조금씩 벌어졌다. 김백경의 위로 아예 올라타 몸을 더 가까이 붙인 채 입 안 더 깊숙한 곳을 더듬었다. 그는 여전히 경직돼 류선재가 하는대로 입을 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달래듯이 뒷덜미를 쓰다듬어주자 어깨가 흠칫대며 떨렸다. 그제서야 안건데 김백경은 여전히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눈꺼풀 사이의 헤이즐넛 색 두 눈동자에 대교의 가로등빛이 비춰 반짝였다. 류선재는 뺨을 붙잡고있던 손으로 그의 눈가를 어루만져 눈을 감겨줬다.

 

 

 김백경은 어느새 완전히 눈을 감았고, 여전히 류선재의 어깨를 꽉 움켜쥔 채 입을 조금 더 벌려 빈틈없이 입술을 맞물렸다. 그때부턴 정신없이 서로의 입 안을 헤집었다. 뜨끈한 숨결은 완전히 얽혀 숨을 들이쉴때마다 차가운 가을공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달려들기만 하는 키스였음에도 류선재가 완전히 몸을 기대버리자 김백경은 무너지듯 뒤로 넘어가버렸다. 류선재의 손바닥이 그의 뒤통수를 감싸고있던 덕에 머리가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그만큼의 충격을 모두 등으로 받아야 했다. 침을 잘못 삼킨 듯 그는 마구 기침을 했고 덕분에 류선재는 아쉬워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도 몸을 일으켜야 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켁켁대는 사람 얼굴에 마구 뽀뽀하고 있자니 김백경이 아직 기침이 채 멎지도 않은 채로 류선재의 어깨를 밀쳤다. 아까와 달리 뒤로 엉덩방아를 찧을만큼 거셌다. 그는 류선재를 떨쳐내고 몇 발자국을 무릎으로 기어가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류선재를 완전히 등진 채 강둑을 벗어났다.

 

 

 류선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은 채 김백경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 등이 온통 흙먼지로 더럽혀져 있었다. 김백경은 그대로 완전히 산책로까지 올라갔고 곧 류선재가 주저앉아있는 아래서는 머리꼭지마저 보이지 않을만큼 멀어졌다. 그렇게 또 류선재는 홀로...

 

 

 ...남을 줄 알았는데. 어느새 돌아온 그가 저 위에서 류선재를 내려다봤다.

 

 

 "안 와?"

 

 

 그 한마디에 류선재는 아까 김백경이 그러했듯 무릎걸음으로 몇 걸음을 기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교복 니트조끼를 한껏 끌어내려 아랫도리를 최대한 가리고 오르막을 올랐다. 산책로로 올라가면서는 김백경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는 류선재의 꼴을 한 번 훑어보더니 한 발 앞서 걸었다. 류선재는 얌전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머지않은 곳에 김백경의 차가 얌전히 주차되어 있었다. 그는 곧장 운전석에 올라탔고 류선재는 그를 따라 조수석 문을 열었다.

 

 

 김백경은 류선재가 안전벨트까지 매고도 한참을 가만히 창 밖만 응시했다. 가로등을 등진 탓에 그의 표정은 류선재에게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쁜 표정은 아닐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럼 우리 사귀는 거예요?"

 

 "아니."

 

 

 둘 다 형편없이 잠긴 목소리였다. 와중에도 류선재는 그 허스키한 목소리가 섹시하다는 생각이나 했다.

 

 

 "형도 저 맘에 드는 거잖아요."

 

 "아저씨라니까 이새끼가 자꾸..."

 

 "말 돌리지 말고요."

 

 

 김백경은 핸들에 머리를 박은 채 몇 번이고 한숨을 쉬다가도 벌떡 일어나 손바닥으로 마구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무어라고 말하려는 듯 한참 입을 달싹이기만 하며 뜸을 들이더니 끝내 이렇게 말했다.

 

 

 "야, 내 나이에 널 만나면..."

 

 "개이득이죠."

 

 

 김백경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뭔 이득? 답잖게 말까지 더듬는 걸 보아하니 류선재가 헛소리를 하긴 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는 또 한숨을 푹푹 내쉬다 시동을 걸었다. 차체가 작게 진동했다.

 

 

 입 안에는 자꾸 한 마디가 맴돌았다. 그놈의 왕복 6차선 도로에서 함부로 뱉어버렸던, 사실은 좀 더 신중하게 하고싶었던 말이었다.

 

 

 차는 어느새 텅 빈 대교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빠르게 스쳐가는 수많은 가로등이 김백경의 얼굴을 마구 훑고 지나갔다. 그는 평소 습관같이 걸쳤던 미소조차 없는 무표정이었으나 어쩌면 그 미소보다도 훨씬 다정한 얼굴로 보이기도 했다.

 

 

 밝은 빛이 비추는 뺨과 눈동자, 굳게 다물린 입술, 평소보다도 힘이 풀린 눈매... 순간 그와 두 눈이 마주쳤다. 김백경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앞만 바라봤다. 류선재 또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봤다. 동시에 하고싶던 말은 그대로 꿀꺽 삼켰다.

 

 

 시간이 약이라는 옛 말이 있다. 그리고 류선재는 아직 어렸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길 테다. 그러니 시간은 충분하다. 류선재는 아주 멀고도 멀, 혹은 머지않을 날까지의 모든 시간을 그를 사랑하는 데에 쓰며 때를 기다리면 되는 거다. 언제라도 늦지 않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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