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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시계

 처음에는 귀신, 유령, 혹은 투명인간 비슷한 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식할 수 없지만 분명히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들.

 

 하지만 머지않아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백경은 그저 그가 살던 세상에서 도려내졌을 뿐이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류선재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다 보니 문득 든 생각이었다. 고작 한 사람이 사라졌을 뿐인데도 P대학은 무척 평화로웠다. 김백경은 그게 이상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기껏해야 누군가의 연애사가 뜨거운 감자 취급을 받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삐끼 출신의 경영대 남신’ 만큼 자극적인 추문이 몇 가지나 될까. 사람을 가린다, 재수 없다, 얼굴만 믿고 나댄다. 등의 추문이 졸졸 따라다니던 선배를 만나지 않은 류선재는 제법 무던했고 인간관계 역시 원만해 보였다.

 

 김백경은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 류선재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류선재가 그의 무릎에 멋대로 올려놓은 가방을 꼭 끌어안은 채였다. 이렇게나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는데도, 류선재는 김백경의 존재는커녕 시선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목을 꼿꼿이 세운 채 앞만 보았다. 손가락이 모두 붙어있는 왼손이 책을 고정하고 오른손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기 위해 움직였다. 류선재의 끊기지 않은 눈썹이 이따금씩 꿈틀거렸다.

 

 날렵한 콧날 아래로 고집스레 다물린 입술이 지금 당장 입 맞추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김백경은 류선재의 모든 모습을 사랑하지만, P대학생 류선재는 그중에서도 조금 특별했다. 1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리고 그 10년 동안, 김백경의 꿈속에서 류선재는 늘 스물한 살이었다.

 

 늘 웃는 얼굴만 보다가 이렇게 까칠한 얼굴을 보니 새삼스레 귀여웠다. 김백경의 얼굴 근육이 조금 느슨해졌다.

 

 수업이 끝났다. 류선재가 책을 덮고 필기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김백경은 작은 기대를 안은 채 류선재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김백경은 류선재가 빈자리라고 생각하고 그의 무릎 위에 덜컥 내려놓은 가방을 내내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니 류선재의 눈에는 가방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이거나, 혹은 아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류선재가 그의 존재를 알아채 주지 않을까?

 

 그 기대는 류선재가 정리를 끝마침과 동시에 깨졌다. 류선재는 김백경의 존재를 깨닫긴커녕 무심히 그 품에서 가방을 빼앗아 갔을 뿐이었다.

 

 하긴, 세상일이 기대대로 되면 김백경의 인생은 아니었다. 김백경은 실망하지 않으려 애쓰며 류선재를 따라 강의실을 나갔다.

 

 

*

 

 

 - 왔어?

 - 응, 늦어서 미안해.

 - 괜찮아. 얼마 안 기다렸어.

 

 연지우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빈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류선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곳에는 연지우가 ‘김백경’에게도 종종 얻어먹었던 휘핑크림이 산처럼 쌓인 바닐라라떼가 놓여있었다.

 

 - 미리 시켜준 거야? 고마워.

 - 뭘.

 

 연지우가 휘핑크림 사이에 파묻힌 빨대를 물었다. 커피를 몇 모금 마신 그가 양손으로 턱을 괴고 류선재와 눈을 맞췄다.

 

 - 넌 이제 수업 다 끝났지? 좋겠다~. 난 아직 하나 더 남았어.

 

 연지우의 투정에 류선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김강휘’가 류선재에게 사랑에 빠지도록 만든 바로 그 미소였다.

 

 - 오늘은 끝나고 뭐해?

 - 지희가 애들이랑 술 한 잔 하자고 해서, 잠깐 들르려고.

 - 응? 근데 지금 나랑 있어도 돼?

 - 시간 좀 비어서 괜찮아.

 

 연지우가 검은 눈망울을 반짝이면서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류선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그래, 선재야. 가끔은 친구들이랑 놀기도 하고 그래. 너 맨날 공부만 해서 내가 걱정이 많았어.

 - 어쭈.

 

 류선재가 제 머리 위에 놓인 손등을 간질이자 연지우가 키득거리며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김백경은 이 꼴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연지우가 다시 빨대를 입에 물었다. 아직 젖살이 덜 빠진 뺨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김백경은 류선재의 옆에 앉아 연지우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어째서인지 마음이 평온했다. 눈앞에 그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10년을 선사해준 장본인이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새삼스레 연지우가 밉다거나 혐오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오랜만에 본 연지우가 고요한 밤에 목격했던 사람 모양의 불덩어리를 감히 연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맑게 웃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누군가를 미워해봤자 이로울 점이 없다는 사실을 알 만큼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 밤에 연지우는 가장 끔찍한 모습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김백경은 질기게도 살아남아 류선재를 다시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김백경은 이전만큼 연지우가 밉지는 않았다. 용서할 수는 없었지만.

 

 - 어쩌면 올해도 전액 장학금 네가 타는 거 아니야?

 

 류선재는 뒷목을 만지며 대꾸했다.

 

 - 아직은 잘 모르지만, 그렇게 됐으면 좋겠긴 해.

 

 아, 1학년의 류선재는 전액 장학금을 탔던 모양이었다. 경찰대 수석도 했을 만큼 머리가 좋으니 경영학과 1등 역시 해볼 만했을 것이다.

 

 평화롭고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연지우는 그 누구도 헐뜯지 않았고 류선재는 친절한 태도로 연지우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참 누구와 누가 사귄다는 이야기를 열심히 떠들던 연지우가 문득 한숨을 푹 쉬었다.

 

 - 나도 대학에 오면 왕자님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평생 연애 한 번 못 하면 어떡하지?

 

 갑자기 등허리가 오싹해지며 영문 모를 소름이 돋았다. 김백경은 뻣뻣하게 굳었지만, 류선재는 잠깐 놀란 듯 입을 벌렸을 뿐 얼마 안 가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 너라면 금방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 정말 그렇게 생각해?

 - 그럼.

 - 히히, 고마워.

 

 웃으며 대꾸한 연지우가 수업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며 종종걸음으로 카페를 나갔다. 류선재는 익숙한지 그저 연지우의 잔까지 카운터에 갖다주고 빨대 비닐을 버렸다. 김백경은 소름이 돋은 팔을 쓰다듬으며 카페를 나서는 류선재를 따라 카페를 나갔다.

 

 

*

 

 

 아.

 

 김백경은 가게 바깥에 우두커니 서서 유리창 너머로 류선재를 바라보았다.

 

 1학년 때는 저와 마찬가지로 경영학과 A반의 아웃사이더였던 류선재는 2학년이 되자 동기들과 제법 친해진 모양이었다. 연지우의 앞에 있었을 때처럼 늘 웃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따금씩 분위기가 떠들썩해질 때면 웃기도 했고 장난을 치듯이 옆에 앉은 누군가를 팔꿈치로 툭 치기도 했다.

 

 류선재가 곤란함 반 짜증 반이 섞인 표정으로 제 얼굴만한 크기의 잔을 넘겨받았다. 주변의 부추김이 이어지자 류선재는 선뜻 잔을 얼굴에 갖다 대며 머리를 젖혔다. 오오! 환호성이 이어짐과 동시에 류선재가 잔을 다 비우고는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박수 소리가 들렸다. 류선재가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가 씩 웃었다. 얘 웃는 거 봐!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김백경은 그 어린 날의 개강 파티 이후로는 술자리의 류선재를 볼 일이 없었다. 류선재는 집에 혼자 있을 김백경을 걱정하느라 회식에도 잘 나가지 않았다. 취해서 돌아온 모습이야 종종 봤지만, 이렇게 술을 마시며 노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달이 하늘 꼭대기에 걸리고 날짜가 바뀔 즈음이 되자, 류선재가 기어코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그 바람에 테이블 위에 있던 소주잔이 엎어지자 옆자리에 앉아있던 이는 짜증을 냈고, 맞은편에 앉아있던 이들은 웃으며 사진을 찍어댔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학생이 류선재를 향해 장난 섞인 욕설을 퍼부으며 한쪽 팔을 제 목에 걸자 멀리 앉아있던 또 다른 남학생이 다가와 류선재의 나머지 팔을 잡았다. 하나, 둘, 셋! 셋은 겨우 몸을 일으키자마자 오뚜기처럼 기우뚱거렸다. 아, 이 새끼 존나 무거워! 야, 류선재. 정신 좀 차려봐⋯⋯. 류선재가 뭐라고 웅얼거렸다. 입 모양을 보니 대충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 집에 좀 가자. 누군가가 친절하게도 주정뱅이의 주정에 응답해줬다. 류선재를 부축한 이들과 아닌 이들은 우르르 가게를 나갔고 양지희가 홀로 남아 계산을 마쳤다.

 

 - 얘 집 어딘지 알아?”

 - 몰라. 누구 아는 사람 없냐?”

 - 내가 알아.”

 

 가게에서 나온 양지희가 지갑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 주소 찍어주면 데려다줄 수 있지?”

 - 있겠니? 얘 진짜 존나 무겁다고. 폰 보고 못 걸어.”

 - 뭐⋯ 그래, 그럼. 그냥 같이 가자.”

 

 양지희가 앞장섰고 류선재를 부축한 두 남학생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그를 따랐다. 다른 이들이 ‘힘내!’, ‘들어가면 연락해!’ 등의 말을 던지며 손을 흔들어댔다.

 

 김백경은 그 뒷모습을 보며 취한 류선재를 홀로 업고 오르막길을 오르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가 아니어도 류선재를 자취방까지 데려다줄 사람들이 많아져서 다행이었다.

 

 

*

 

 

 류선재는 김백경에게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 그래서 김백경도 이런 생각은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려 노력해왔다. 어차피 돌이키지도 못할 일로 고심해봤자 피곤해지기만 할 뿐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면서.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 들이밀어지는데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김강휘’의 존재가 도려내진 세상은 이렇게나 평온한 것을.

 

 김백경은 류선재의 앞에 누워 잠든 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눈썹이 끊어지지 않고, 왼쪽 새끼손가락이 온전한 류선재는 무척 편안해 보였다.

 

 어쩌면, 류선재는 ‘김강휘’를 만나지 않는 편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이 말을 류선재에게 한다면 대놓고 속상해하며 한사코 부정하겠지만, 적어도 김백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류선재는 ‘김강휘’를 만나 경찰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이뤘다고 말했지만, 경찰의 삶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류선재는 끊임없이 구르고 깨지고 다쳤으며 보기 싫은 꼴을 잔뜩 봐야만 했다.

 

 어쩌면, 어릴 적의 꿈은 그저 꿈으로 남겨두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

 

 이건 김백경이 세상을 알 만큼은 나이가 들어서 할 수 있는 생각일까.

 

 누가 그를 이런 꼴로 만들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고작 그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수많은 사람이 평화를 얻지 않았던가.

 

 김백경은 류선재의 뺨을 만지려고 했다. 그러나 손바닥은 맥없이 류선재의 뺨을 통과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허공을 만지는 듯했다. 류선재에게 닿을 수 없다는 점에 늘 절망해왔지만, 지금만큼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백경은 류선재에게 닿을 수 없었고, 류선재는 그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니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

 

 

 

 비가 오고 있었지만 다리가 욱신거리거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류선재는 죽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건 숙취 때문이었지 비 때문은 아니었다.

 

 술을 그만큼 마셨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김백경은 피식 웃으면서도 조금은 안쓰러운 마음으로 류선재의 초췌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갈림길이 나왔다. 류선재는 왼쪽으로 걸었지만 김백경은 그를 등지고 오른쪽으로 걸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류선재와 떨어졌다. 심장이 뜯어져 나간 것처럼 텅 빈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조금은 홀가분하기도 했다.

 

 얼마 안 가 기찻길이 나왔다. 원래 이 동네에 기차가 다녔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백경은 철도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눈동자 위로 떨어질 때마다 눈을 감았다 떴다.

 

 저 멀리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졌다.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김백경은 죽음을 마주 보았다. 죽음은 환한 빛을 내며 그를 덮치려고 했다.

 

 그러나⋯⋯.

 

 “선배!”

 

 누군가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덩치가 큰 편이 김백경도 그에게 떠밀려서는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데 엉켜 흙바닥을 굴렀다. 툭, 투둑. 얼굴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를 짓누르고 있는 품은 단단했다.

 

 김백경이 그의 등을 끌어안자 마치 맞춘 것처럼 몸이 꼭 들어맞았다.

 

 이번에도 네가 날 살리는구나.

 

 얼굴이 푹 젖어 들었다.

 

 김백경은 꿈에서 깨어났다.

 

 

*

 

 

 “선배, 선배!”

 

 눈을 뜨자 류선재의 끊어진 눈썹이 가장 먼저 보였다. 김백경이 절 잡고 있는 류선재의 왼팔을 더듬어 잡았다. 왼쪽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괜찮아요?”

 

 괜찮냐고? 김백경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악몽 꾸는 것 같아서 깨웠는데, 괜찮아요? 너무 안 좋아 보이는데.”

 악몽이라. 그게 악몽이었을까?

 

 김백경은 무슨 말이라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독히도 목이 말랐다. 그가 캑캑대자 류선재가 곧바로 일어나서 그에게 물을 떠다 주었다.

 

 김백경은 한 번에 물잔을 비웠다. 그가 잔을 협탁으로 올려놓기 위해 손을 뻗자 류선재가 김백경의 손에서 부드럽게 물잔을 뺏어서 협탁 위에 놓아주었다.

 

 목이 축축해지자 이번에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자 류선재는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그를 기다려주었다.

 

 “⋯⋯선재야.”

 

 김백경이 한참 만에 목소리를 내자 류선재가 그와 눈을 맞추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김백경이 류선재의 왼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만약, 네가 날 만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네?”

 “네가 날 만나지 않았다면 넌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지금 잃고 없는 것들을, 잃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연지우와의 관계, 어머니와의 관계, 타인의 원한이나 왼손 새끼손가락과 같은 것들.

 

 더듬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예전부터 그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면 말을 잘 못하지 않았던가.

 

 김백경은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고개도 들지 못했다. 한참 말이 없던 류선재가 그의 양 뺨을 잡았다. 고개가 천천히, 부드럽게 들어 올려졌다.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입술부터 닿았다. 김백경의 이마에 입 맞춘 류선재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의 눈가에 부드러운 주름이 져 있었다.

 

 “글쎄요. 정말 그럴까요?”

 “⋯⋯.”

 “선배를 만나지 않았다면 경찰도 못 됐을 테고, 그럼 잠입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새끼손가락이 잘릴 일은 없었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요, 선배⋯⋯.”

 

 류선재가 김백경을 부르며, 새끼손가락이라는 단어에 반사적으로 움직인 눈동자를 도로 돌려놓았다.

 

 “선배가 없었다면 저는 지금 얻은 가장 소중한 걸 얻을 수 없었을 거예요.”

 “⋯⋯.”

 “그게 뭐냐고 물어봐주세요.”

 “⋯⋯그게 뭔데?”

 

 류선재가 씩 웃었다.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행복이요.”

 “⋯⋯.”

 “전 선배를 만나서 너무너무 행복해요.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정도로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선배를 만나지 않았다면 전 지금 잃고 없는 것들을 잃지 않을 수는 있어도, 행복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저한테는 지금 얻은 행복이 잃은 것들보다 훨씬 값져요.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김백경은 류선재의 진실한 눈동자에 비친 스스로를 응시했다.

 

 눈이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김백경이 우는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숙이자, 류선재가 푸스스 웃으며 김백경의 등을 끌어안았다.

 

 나이가 들고 함께한 시간이 늘어나며 김백경은 딱히 변한 게 없었지만, 류선재는 10년 전처럼 불안해하지 않고 여유를 갖게 되었다. 김백경이야 평생을 그렇게 살았지만 류선재는 그저 잠깐 틀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류선재는 김백경이 없었으면 행복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하지만, 그건 류선재가 그런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김백경은 현실의 류선재가 꿈속의 류선재보다 행복할 거라고는 확신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백경은 그와 함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해주는 류선재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고마움을 느꼈다. 김백경이 류선재와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한 것처럼, 그 역시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앞으로도 계속, 그를 안고 그에게 안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김백경이 젖은 눈을 휘며 행복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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