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사이트
끝과 시작
W. 비소
00. 고해성사
류선재는 그리 신실한 신자는 아니었지만서도 종종 누군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릎을 꿇고 꼭 손가락 하나만큼의 빈자리를 느끼며 손을 모아 그 신성한 누군가에게 엎드려 빌고 싶었다.
‘제가 잊지 않았더라면, 제가 모든 걸 기억했었더라면 조금 더 나았을까요. 십년이 지나 당신을 못 알아봐서 미안해요. 기껏 경찰이 되어서도 당신을 못 지켜줘서 미안해요. 당신이 나를 필요로했던 그 모든 순간에 내가 부재해서 미안해요. 당신이 나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내가 당신을... 잊고있어서 미안해요. 미안해요.... 정말...미안합니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점차 울음으로 바뀌어가는 그 고해성사를 하고 있으면 그럼 그 상대는 속도 없이 웅크린 자신보다도 더 몸을 낮춰왔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재야.’
죄인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해.’
마치 신을 모시듯.
그러면 류선재는 지옥불 한가운데서 천사를 만난 것같은 기분으로 그저 화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류선재는 십년이 지나서도 그 조건 없는 사랑을 헤아릴 수 없었다.
01. 꿈속으로
류선재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김강휘가 십년의 기억을 통째로 잃는다면 제가 기꺼이, 아니 감히 김강휘의 십년을 짊어지겠다고. 그것은 류선재가 언젠가부터 반복한 고해성사와 맞닿아있는 것이기도 했으며 죄책감과 사랑과 미안함이 한데 섞여서 나타난 결과물이기도 했다.
“...누구세요?”
그러니까 이건 따지자면, 기회였다.
* * * * *
류선재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데 썩 능한 인간은 아니었으나, 그게 김강휘와 맞닿아있는 거라면 조금 달랐다. 제 눈앞에 서있는 잘생기고도 앳된 이 남자는 ‘김강휘’였다. 새끈하게 잘빠진 정장을 입고 자신을 밀어냈던 ‘김백경 실장님’이나 류선재의 현실에서 새근거리며 편안한 잠옷을 입고 곁에서 자고있는 ‘김강휘 선배’가 아니라 류선재가 알지 못했던 순간의 ‘김강휘’.
‘이전에도 이런 꿈을 꿨던 것 같은데.’
하지만 꿈이라는 게 워낙 빠르게 잊혀지고 엉망으로 뒤섞이는 것이라 류선재는 확신할 수 없었다. 류선재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몇 살이야?”
“저기, 죄송한데... 누구신지 모르겠어서.”
“혼자야?”
“...아버지랑 같이 살긴하는데, 지금은 안 계셔요. 혹시 상환 관련한 거라면 월말까지는 어떻게든....”
“지금 스물셋이야? 둘?”
“...스물셋이요.”
“...어리네.”
“.......”
류선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도르륵 굴렸다. 류선재도 익숙한 장소였다. 어떻게든 좋은 기억은 없는 이곳은 십년하고도 일년 전, 김강휘의 집이었다. 그리고 제 눈 앞에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김강휘는 다리 한 쪽에 무게를 실으며 절뚝대지도 않았고, 눈 옆에 불에 그을린 흉터도 없었다.
“대학생이지?”
“...누구세요?”
“나는....”
할말이 없었다. 다짜고짜 이번년도에 복학하면 만나게 될 두살 어린 후배라고 이야기하면 웬 미친놈이 될 게 뻔했고 대충 둘러대자니 빚쟁이라는 오해를 사게될 것 같았다. 류선재는 되는대로 입을 열었다.
“너희 아버지의....”
“네?”
“...친구?”
당연하지만 만나뵌 적은 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만나뵙고 감사인사와 사과를 동시에 드리고 싶은 존재이긴 했으나 여튼 그랬다. 류선재의 말이 끝나자 김강휘의 표정은 한층 더 일그러졌다. 류선재는 그제서야 김강휘의 부친과 제 나이의 차이를 짐작하고선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의 아들.”
“.......”
“,,,의 아는 형.”
“...네?”
김강휘의 표정이 당황과 황당의 중간 어디쯤으로 물들어갔다. 류선재는 속으로 경악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 표정을 꾸며냈다. 자연스럽게 김강휘의 부친의 친구의 아들의 아는 형이 말을 거는 것처럼 행동하기 위해서 애썼다.
“...저희 아버지의 친구분의 아들의 아는 형이시라고요?”
“응.”
“저를 어떻게 아세요?”
“건너건너 얘기 들었지.”
“.......”
류선재의 등 뒤로 식은땀이 한줄기 흘렀다.
‘좆됐는데?’
“...여기는 왜 오셨어요?”
“김 사장님네 아들이 그렇게 잘생겼다고 해서....”
“아....”
‘좆됐다.’
이제 류선재는 한겨울에 아는 동생의 아버지의 친구의 아들이 잘생겼다고 해서 보러온 미친놈이 되어있었다. 김강휘는 긴장이 좀 풀린대신 웬 미친놈 만났다는 듯 류선재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미친놈 취급받을 거면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을 하고있을 때쯤 김강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더 할 말 없으시면 저는 들어가보겠습니다.”
그리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잡았다. 류선재가 다급하게 김백경의 손목을 잡자 김백경이 멈춰서서 류선재를 흘끗 돌아봤다.
“잘생겼네.”
“...그쪽도 잘생기셨어요.”
김강휘가 다시 문을 잡자 류선재는 좀 더 강한 힘으로 김강휘를 붙들었다.
“나 잘생겼어?”
“네. 저 근데 들어가봐야하는데.”
“밥 먹었어요?”
“네.”
“전 안 먹었어요.”
“아.... 그러시구나. 맛있게 드세요.”
싱긋 웃으면서 문을 꽉 잡는 김강휘의 손목을 잡고 능청스럽게 류선재가 말을 붙였다.
“같이 먹을래요?”
“아뇨. 전 먹었는데요.”
“이 근처에 뭐가 맛있어요?”
“전 집에서 먹어서 잘 모르겠어요.”
“집에서 해준다고요?”
김강휘가 멍하게 류선재를 바라보자 류선재는 김강휘의 어깨에 얼른 팔을 두르고 가까이 끌어당기며 몸을 돌렸다.
“응큼하네.”
얼이 빠진 사이 류선재는 힘으로 김강휘를 끌며 길을 내려갔다. 류선재가 비탈 한 가운데 서있는 제 차 앞에 도달할 때까지 김강휘는 멍하게 서있다가 한숨을 내쉬고 조수석에 천천히 올라탔다.
류선재가 안전벨트를 매주려고 몸을 기울이자 김강휘가 잽싸게 안전벨트를 맸다. 류선재가 머쓱하게 손을 거두자 김강휘가 어설프게 입을 열었다.
“...차가 좋네요.”
“그쪽이 사줬는데?”
“네.”
김강휘는 류선재의 헛소리에 큰 감흥을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는지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고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건 진짠데.’
류선재는 속으로 중얼거리고 안전벨트를 맨 후 익숙하게 시동을 걸었다.
“차로 올라오는 거 쉽지 않으셨을텐데.”
“내가 또 베스트 드라이버예요.”
“그러시구나.”
“운전면허 있어요?”
“아뇨.”
“나는 있는데.”
“축하드립니다. 무면허 운전이면 신고할 뻔 했는데.”
“어디로? 제가 경찰인데.”
“...예.”
류선재는 양치기 소년이 된 것같은 기분으로 열심히 해명했다.
“진짜예요. 공무원증을 안 들고왔는데... 지금 안 믿죠?”
“믿어요.”
“진짜라니까. 경찰가도 부를 수 있어요.”
“믿는다니까?”
“무-궁화 아름다아운 삼천리 강-산 고-귀한 우리 겨어레 살고있는 곳~”
류선재가 아랑곳하지 않고 경찰가를 부르자 김강휘는 입을 딱 다물고 류선재를 바라보다, 류선재가 하이라이트에서 두번 삑사리를 내고 고음을 세번 옥타브 낮춰서 부르자 이를 앙다물고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턱이 잘게 떨리는 게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땅에 굳게! 서다- 민주 경찰-.”
1절이 끝나자 김강휘는 차마 못참고 크흡하는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를 못들은 척 류선재가 2절을 부르기 시작하자 김강휘가 결국 하하 소리내어서 웃었다. 류선재는 김강휘의 눈이 휘었다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 얼굴이 찡그려졌다하는 걸 흘깃흘깃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는 손에서 배어나오는 땀을 번갈아가며 바지에 닦았다.
박수까지 짝짝친 김강휘가 웃느라 맺힌 눈물을 닦았다. 류선재는 김강휘의 얼굴이 다채롭게 바뀌는 걸 거의 넋을 빼고 바라보다가 두 번이나 길을 잘못 들었다. 하지만 꿈은 꿈인지 차도에는 차가 없었고 길을 잘못 들었음에도 왜인지 원래 가려고 했던 식당이 눈에 보였다.
익숙하게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린 둘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코스요리 주로하는 양식집인데 꽤 괜찮았어서 같이 오면 좋겠다싶었지.”
“저보고 추천해달라면서요.”
“그건 다음에.”
“다음?”
“이렇게 애프터 신청을 하는 거지.”
“뭔,”
김강휘가 입을 열려는 순간 익숙하게 자리로 안내한 류선재가 메뉴판을 건넸다. 메뉴판을 받아들고 어정쩡하게 서있는 김강휘를 앉히고 류선재는 반응을 살피며 살치살 스테이크가 메인 요리인 코스요리를 주문했다.
적절하게 나온 코스요리를 먹으며 류선재는 김강휘에게 이것저것 질문했고 김강휘가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음식을 먹기 좋게 잘라서 건넸다. 김강휘는 입까지 가까워진 포크가 부담스럽다는 듯 고개를 뒤로 물렸지만 류선재는 그때마다 솜씨 좋게 입안으로 음식을 넣어댔다.
“맛있어?”
“...네.”
“다행이네. 혹시 입에 안 맞을까봐 걱정했는데.”
“저 음식 가리는 거 없어요.”
“그럼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은?”
“다 잘 먹어요.”
“고기 좋아하던데. 달달한 거 좋아하고. 혼자있으면 간단하게 먹는 거 좋아하고,”
“...저 단 거 잘 안 먹는데요.”
“좋아해.”
“네?”
류선재는 어쩐지 코가 다 시큰해지는 느낌으로 말을 이었다.
“단 거 좋아한다고. 생크림 케이크같은 거.”
“제가요?”
“과일 올라간 거.”
“.......”
둘은 한참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김강휘는 대수롭지 않은 체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 누구랑 착각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저 단 거 안 좋아해요. 생크림 케이크도 딱히....”
김강휘는 잘생겼지만 험상궂은 감이 없지않아있는 제 앞의, 경찰이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괜스레 분위기를 조금 누그러뜨리려 입을 열었다.
“제가 상상력이 빈약하긴한데요, 혹시 저랑 닮은 사람이랑 헷갈리셨다거나....”
“.......”
“저 닮은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김강휘는 머쓱하게 농담도 한 번 던졌으나 류선재는 한참동안 묵묵부답이더니 하!하고 코웃음을 쳤다.
“내가 헷갈릴 리가 있겠어? 이렇게 잘생긴 사람 보기가 흔한 일인 줄 아나.”
김강휘는 막상 제 농담에 반격하는 류선재를 맞닥뜨리자 민망해져서 의미없이 앞에 놓인 음식을 쿡쿡 찔렀다. 김강휘가 음식을 가만히 찌르는 걸 바라보던 류선재가 김강휘의 입 안에 음식을 쏙 넣어줬다.
“아, 제가 먹는다니까요?”
“지금 스테이크가 포크에 상처받은 거 안 보여요?”
음식을 열심히 씹어서 꿀떡 넘긴 김강휘가 입을 열었다.
“근데 진짜 왜 오신 거예요?”
류선재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 근처에 순찰할 일이 생겨서 오다가 우연히 마주쳤는데 생긴 게 너무 김 사장님 아들이라 그동안 내적친밀감이 좀 쌓였어서. 보니까 밥 한 끼 사주고 싶던데?”
“왜요?”
“내 취향이어서 그랬나?”
“미친....”
류선재는 속으로 인간이라면 김강휘를 안 좋아하고 배기겠냐며 몇 번 딴 죽을 걸었지만 용케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저 근데 생크림 케이크 먹어본 적 없어요.”
“어?”
류선재가 얼빠진 소리로 되묻자 김강휘가 매쉬 포테이토를 떠서 입에 넣었다. 대충 이로 뭉개며 삼키고 나서 말을 이었다.
“아니, 사달라는 소리는 절대 아니고요. 그니까 생크림 케이크 좋아하는 거 저 아니라고요. 누굴... 투영해보는지는 모르겠지만.”
‘니가 생크림 케이크 좋아한다고 했잖아!’
소리없는 아우성을 뚫고 류선재는 멍청하게 입을 열었다.
“...자, 생각해봐요. 부드러운 시트에 생크림이 발려있는데 그 위에 과일이 있는 거야. 신선한 걸로.... 겨울이니까 딸기가 좋겠다. 달달하고 부드럽고 상큼한데? 어때요? 맛있겠죠?”
“홈쇼핑 호스트세요?”
‘호스트? 호스트바에서 일하긴 했는데. 그쪽이 상사였고.’
잠시 생각이 딴데로 샌 류선재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김강휘의 ‘취향’이라는 게 생길 법한 시점과... 그 취향이 모조리 저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그럼 단 한 번도 생일을 축하해 본적이 없었을까?’
‘그러면 생일 때는 뭐 했을까? 아르바이트?’
그리고 십년도 전에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자신의 자취방만 오면 꾸벅꾸벅 졸던 김강휘를 떠올렸다.
조금 뒤에는 십년 뒤 김백경도 일만 마치면 유난히 졸려하며 병든 닭처럼 한참을 자던 것도 떠올렸다.
김강휘가 제 옆에서 편하게 자는 건 물론.... 좋았지만, 반대로 생각한다면.
‘그럼 내 옆이 아니면 제대로 잠을 못 잤을까?’
물어볼 게 많았으나 제 앞의 김강휘는 그 어떤 것에도 답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정작 기회가 있어도 류선재는 겁쟁이라 물어보지도 못했다.
“...생일.”
류선재는 접시를 밀며 웅얼댔다.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에 같이 있어주고 싶다.”
“.......”
“생일에.”
“.......”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는 김강휘에게 유난히도 추운 날이 될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류선재의 마음이 다 지끈거려왔다.
“축하해주고싶어. 너무... 추운 날이어서. 춥지 않았으면 좋겠고. 이번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저기요.”
“생크림 케이크도 먹었으면 좋겠고. 제일 큰 걸로....”
그 날의 김강휘가 정확히 어땠는지, 그리고 그 이후 십년을 어떻게 살았는지는 여전히 류선재에게 알 수 없는 정보였다. 그때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괴로워졌으므로 둘 다 암묵적인 합의 하에 저 멀리 치워둔 일이기에 더욱 그랬다. 류선재는 문득 김강휘의 발밑에 엎드려 빌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아직 그 모든 것을 겪지 않은, 류선재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김강휘는 잔뜩 혼란스럽고도 차가운 표정으로 류선재에게 물었다.
“누구세요?”
* * * * *
좀 전의 가벼운 분위기는 제법 죽고 싸늘해져버린 공기 속에서 류선재는 묘한 눈으로 김강휘를 보다가 입을 몇 번 달싹였다. 류선재가 입을 열지않자 김강휘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까부터 이상했어요. 경찰인 건 맞아요?”
“맞아요.”
“그럼 저 뭐 잘못했나요? 아니면 저희 아버지가....”
“아냐. 진짜 건너건너 들은건데....”
“제가 멍청이로 보이세요?”
류선재는 김강휘를 진정시킬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김강휘는 류선재를 피하는대신 꼿꼿하게 서서 눈을 맞춰왔다.
“그러니까 얘기를 제대로 하라고. 누군지. 얼떨결에 휩쓸려 여기까지 따라온 건 저라서 뭐라고 할 말이 없긴한데요, 적당히 모른척하고 넘어가는 것도 한계가 있죠.”
류선재는 입을 몇 번 달싹였다 이내 닫았다. 해명할 말이 없기도 했고 제 앞에서 날을 세우는 김강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싸하게 뒷골이 식는 기분이 낯설기보다는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변명과 거짓말 어디쯤을 헤매고 있을 때 김강휘가 한숨을 쉬더니 등을 돌려 걸어갔다. 류선재는 다급하게 김강휘의 뒤를 쫓았다.
“왜요?”
“...너 여기서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잖아.”
“한국 안인데 걷다보면 나오겠죠.”
“커피 마시러갈래?”
“아뇨.”
“딸기 생크림 케이크에다가....”
“됐습니다.”
“녹차라떼 마셔도 돼.”
김강휘는 질린다는 듯이 류선재를 바라보다 마지못해 말을 내뱉었다.
“...커피 마시고 보내주세요.”
02. 꿈과 현실
둘은 마주 앉아서 나란히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제 몫으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시킨 류선재가 익숙하게 달달한 시그니처 커피를 한잔 시켜서 김강휘에게 내밀었다.
“케이크 먹을래?”
“괜찮아요.”
“이미 시켰어.”
류선재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동벨이 울리더니 트레이더미가 카운터로 차곡차곡 쌓였다. 케이크 타령을 하길래 한두 개 인기있는 메뉴로 시킨 줄 알았더니 류선재는 총 일곱 조각의 케이크를 주문해서 김강휘 앞에다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세 조각이었다. 류선재는 김강휘가 한 소리 하기 전에 잽싸게 케이크를 푹 떠서 김강휘의 입에 넣었다.
“맛있지?”
“...맛있긴하네요. 원래 케이크 잘 안 먹는데.”
“내가 사랑을 담아줘서 그래.”
류선재가 그 큰 덩치를 잔뜩 움츠려 애교를 떨어대자 살얼음 같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케이크를 꿀떡 삼킨 걸 확인하자 류선재는 잽싸게 다시 한 번 케이크를 푹 퍼서 김강휘의 입에다 넣었다. 그런 짓거리가 몇 번 반복되자 김강휘는 류선재가 포크를 들기도 전에 알아서 제 손으로 케이크를 푹푹 떠서 입에다 넣기 시작했다.
그 많던 케이크가 십분도 채 안 되어서 둘의 입으로 사라지고 나자 둘은 커피를 마시면서 되도 안한 농담을 했다. 정확히는 류선재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김강휘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려댔다.
“그러면 복학해?”
“해야죠. 이제 스물셋인데.”
“스물셋이면 어리지. 나는 스물셋에 경찰대를 갔는데.”
“왜요?”
“경찰대 가기가 쉬운 줄 알아? 인마.”
“아니 어려운 건 알죠. 4수를 할 정도면 경찰 진짜 되고 싶었나보네요.”
“중간에 학교를 가긴 했어.”
“오?”
흥미로운 주제인듯 한 쪽 눈썹을 찡긋거리는 김강휘에 류선재가 마치 비밀이라도 털어놓는듯 작게 속삭였다.
“p대.”
“어?”
“명문이지?”
“신기하네. 저도 p대라서.”
“잘생겼는데 공부도 잘하고 다 가졌네.”
“이게 뭔....”
“왜? 하루이틀 듣는 소리도 아니잖아.”
커피를 빨대로 휘휘 젓는 김강휘의 귀끝이 붉어져있었다. 류선재는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는 스물셋의 김강휘 표정이 흥미로워서 아예 대놓고 김강휘 앞에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거울 볼 때마다 너도 스스로 좀 감탄하지 않아? 연예인 봐도 감흥도 없지?”
“태어났을 때 병원 난리났겠다. 너무 잘생겨서.”
김강휘가 류선재에게 억지로 빨대를 물리고 나서도 류선재는 잘생긴 사람이 주는 커피 잘 먹겠습니다 따위의 소리를 하고 자빠졌다. 다채롭게 김강휘의 얼굴을 감탄하는 류선재의 말을 들으며 창의성의 발견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류선재는 또 혼자 얼굴이 어두워져서는 침묵했다.
김강휘는 그냥 존재했을 뿐인데 그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목적 혹은 표적으로 변모되어서 재미를 위한 다트판이 되었을 적이 잦았다. 사람들은 재미로 다트를 꽂아넣었지만 그 다트는 곧바로 작살로 바뀌어 날카롭게 백경을 뚫었다.
류선재는 그 작살을 대신 맞아주고싶다고 생각했으나 이미 그때는 잔뜩 작살에 꿰인 채였고 류선재는 그의 목적, 혹은 존재를 잊고야말았다.
그러나 김강휘는 그의 망각조차도 자신의 죄인양 괴로워하며 후회를 했다고 했다.
그리고 류선재는 그의 속죄조차도 김강휘의 죄가 되어 후회를 할 수도 없었다.
그의 사랑한다는 고백은 음절 하나마다 과하게 무거워서 결국 십년간 그의 마음을 짓눌렀던 것이다.
류선재는 너무나도 늦게 깨달았다.
류선재는 지금 그 모든 것을 겪지 않은 김강휘를 맞닥뜨렸고, 그런 그에게 감히 속죄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입안이 쓰고도 달았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을까?
류선재는 문득 김강휘의 손을 잡았다. 김강휘는 놀란듯 몸을 움츠렸지만 손을 빼지 않았다. 류선재는 김강휘의 손을 잡고 손가락 끝으로 손바닥을 갉작였다.
김강휘의 손은 따뜻했고 현실감이 넘쳤다. 류선재는 이게 꿈이었다는 걸 알았으나 맞은편에 앉은 김강휘는 이게 현실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이건 꿈일까, 현실일까?
“나는,”
류선재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 * * *
나는 류선재예요. 지금은 서른둘이 되었는데 그쪽의 나이를 앞뒤로 반전한 것과 같네요. 당신의 나이보다 아홉 살이 많아졌고 여전히 당신은 저보다 두 살이 많아요. 우리가 아는 사이냐고요? 그럼요. 아는 사이죠. 그때의 당신의 모습을 이제는 생생하게 기억을 해요. 당신은 지난 십년간 그 기억을 몇 번이고 되새겼으나 저는 그러지 못했죠. 제가 당신을 잊었으니까. 지금 제가 약간 미친 것 같이 보이겠지만 멀쩡하고, 아니 아닌가. 여튼 제정신이에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당신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당신을 구하고 싶어서....
류선재는 대화보다는 독백에 가까운 말을 쏟아냈다. 김강휘가 미친놈 취급하며 등을 돌려 가버릴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차분하게 류선재의 말을 들었다.
류선재가 말을 다 끝내고 나자 김강휘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겨우 한 마디를 뱉었다.
“솔직히 말하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
“도통 현실감이 없는 얘기라서. 말만 들으면 지금 제가 경찰관님을 병원이나... 경찰에 신고해야하는 것 같긴한데 왜인지 엄청 허황된 얘기처럼 들리지도 않는 게 신기해요.”
“.......”
“약간 꿈 꾸는 것 같네요.”
[류선재는 이게 꿈이었다는 걸 알았으나 맞은편에 앉은 김강휘는 이게 현실이라고 믿었다.]
‘알았다고?’
[류선재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데 썩 능한 인간은 아니었으나, 그게 김강휘와 맞닿아있는 거라면 조금 달랐다.]
[하지만 꿈이라는 게 워낙 빠르게 잊혀지고 엉망으로 뒤섞이는 것이라 류선재는 확신할 수 없었다.]
류선재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데 썩 능하지 않았고 얼마 전까지는 자기가 악몽을 꾼다는 것조차 자각 못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꿈이라는 건 워낙 빠르게 잊혀지고 뒤섞인 것이라서 꿈과 확신은 한데 섞이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꿈일까? 현실일까?
“그럼 경찰관님은 이 이야기를 저한테 해주시는 이유가 뭔데요? 얘기 안 하려고 하신 것 같은데.”
“...이야기를 듣고싶었어요. 제가 없는 시간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꿈이라면 류선재가 모르는 이야기는 나올 수 없었다. 류선재는 도박과 수사 그 중간을 겨눴다.
03. 질의응답
“근데 저는 아직 경찰관님을 모르잖아요. 이름이랑 나이는 방금 말씀해주셨다지만.... 그럼 먼저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해주세요.”
“어떤 게 궁금해요?”
“경찰을 취조하는 건 처음이네요. 실은 취조가 처음이긴해요. 여튼 제일 궁금한 건 그거예요.”
우리 무슨 사이인데요?
김강휘의 질문에 류선재는 마른 침을 삼켰다. 긴장으로 목소리가 갈라져서 얼음을 두어개 입에 넣고 으적으적 씹었다.
“뭐어.... 사실혼?”
“미친.”
류선재의 삑사리보다도 충격적인 내용에 김강휘가 입을 딱 다물었다.
“거짓말 아니죠?”
“아니죠.”
“솔직히 아까부터 다 거짓말하고 있다는 게 제일 신빙성있긴한데.”
“오히려 너무 거짓말같으면 진짜라는 말이 있어요.”
“사실 허언증인지 의심하고 있었는데.”
“서운하네!”
류선재의 말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한 김강휘가 말했다.
“그럼 이제 물어보세요. 번갈아가면서 질문 하는 게 낫겠어요.”
“작년에는 뭐했어요?”
“군대... 제대하고 일을 했는데 뭐 딱히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닐만한 일은 아니어서.”
“어쩌다가?”
“군대 선임 형이 소개해준 일이었는데.... 그냥 돈 많이 번다는 말에 혹한 거죠. 그리고 할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일도 제대로 못하고 여러모로 좋은 경험은 아니었어요.”
“군대 선임?”
“지금은 연락 안 하지만. 이것도 제가 일방적으로 끊은 거죠.”
‘아 이 씹새끼가....’
류선재는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김강휘의 군대 선임이 너무 자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던 탓이었다. 물론 그 선임은 지금 시점에야 죽고 없어져 매일 밤 부활시켜서 다시 죽이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원망할 대상의 흔적으로도 못 남았다지만 이렇게까지 김강휘의 초반부마저 꼬아놓았을지는 몰랐다.
“스무살짜리한테 그런 일자리 소개해줬다는 것부터가 글렀는데.”
“저랑 안 맞았던 거죠, 뭐. 제가 모르는 사람들이 저를 알고... 저에 대해서 떠들고 그런 것들을 못 견디는 성향이어서. ...영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아닌데? 영 나쁜 사람인데?”
“아니... 뭐. 딱히 두둔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라서 할 말은 없다만.”
그냥 나쁜 사람도 아니고 인간말종쓰레기라고 얘기하려다가 그냥 입을 닫았다. 십년하고도 일년 전의 김강휘를 만나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이 상황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김강휘는 다 먹은 컵을 빨대로 휘휘 젓다가 턱을 괴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 밖은 텅빈 거리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류선재는 잠시 김강휘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나갈까요?”
김강휘는 대답하는 대신 몸을 일으켜 류선재를 따라갔다.
그렇게 둘은 차에 타서 시동을 걸고 출발할 때까지 기묘한 침묵을 유지했다. 침묵을 깬 건 류선재였다.
“술 한 잔 할까요? 그냥 헤어지긴 아쉽잖아.”
김강휘는 류선재의 말에 고개를 그냥 끄덕였다. 정적 속에서 류선재는 손에 배어나오는 땀을 문질러 닦고는 전면창을 노려봤다. 도로에는 어떤 차도 없었고, 아무렇게나 달려도 결국 목적지에 도착할 걸 알았다.
둘은 술집에 도착해서는 안주 여러개와 맥주 두 병, 소주 두 병을 나란히 시키고는 잠깐 짬을 내서 바깥에 나왔다. 류선재는 김강휘가 담배불을 붙이는 걸 바라보다가 말끔하고 흉터없는 김강휘의 눈가를 손으로 느릿하게 쓸었다. 김강휘는 몸을 움찔거렸으나 류선재를 밀어내는 대신 가만히 있었다.
류선재의 엄지손가락에 부드러운 피부가 닿고 차례로 긴 속눈썹이 닿았다. 김강휘는 류선재가 눈가를 쓸어내리는 탓에 기껏 담배불을 붙여놓고도 제대로 한 모금도 피우지 못했다.
“...펴요. 담배.”
거칠거리는 목소리로 말한 류선재에 김강휘는 대답대신 입에 담배를 물고 조금 빠른 속도로 피웠다. 류선재가 담배불을 붙일 때쯤 이미 김강휘의 꽁초는 절반 이상 타들어가 있었다. 김강휘가 담배불을 지져 끌 때쯤 류선재는 반도 못 태웠으나 그대로 담배를 버렸다.
혀 끝에 맴도는 멘솔향이 현실감 넘쳤다.
둘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코가 빨개질동안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담배불을 붙여주느라 가까워진 거리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시선을 먼저 피한 건 김강휘였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타이밍 맞춰 안주가 세팅되었다. 류선재가 소주 뚜껑을 돌려따서 김강휘의 잔을 채웠다. 둘은 소주잔을 맞부딪히고 술을 비워냈다.
둘 다 영 주량이 강한 편이 아니라서 빈 병이 늘어날 때마다 둘은 빠르게 취기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서로 떠보려고 시작한 질의응답이 점차 농담따먹기로 변모하고 있었다. 류선재가 김강휘한테 거울보면서 스스로 감탄한 적이 몇 번이냐고 질문하고 거기다 김강휘가 경찰관님은 일상 얘기는 안 궁금하다며 대꾸할 때쯤에는 둘 다 상당히 취해있었다.
김강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푹 숙였다가 풀린 눈으로 류선재를 응시하면서 물었다.
“이젠 제 차례죠. 저 좋아하세요?”
“사랑하는데.”
류선재의 말에 킥킥 웃은 김강휘가 안주로 나온 멜론을 집어서 씹은 후 말했다.
“사실 원래는 제가 그쪽을 좋아하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물어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요.”
“...무슨 의미야?”
“그거 질문이에요?”
“.......”
“...잠깐 나가요.”
“.......”
“아이스크림 사 줄게요.”
류선재는 대답없이 김강휘를 일으켰다. 살짝 비틀거리긴 했으나 그래도 영 못 걸을 수준은 아니었다. 둘은 가게 뒷편으로 걸어나와서 벽에 기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이스크림 사준다더니?”
“담배 피우고....”
김강휘가 씩 웃으며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류선재도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절반쯤 담배를 태웠을 때, 김강휘가 류선재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살면서 막막할 때가 많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얘기를 할만한 사람이 없었기도 하고. 관심을 받는 게 좋은 건지, 아니면 안 좋은 건지.”
“관심?”
“...힘들 때가 많았거든요. 저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절 알고, 친근하게 여기고, 제게 그런 것들을 요구하고....”
“그런 것들?”
류선재가 인상을 찌푸리자 김강휘가 당황한 얼굴로 황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따지자면 제 잘못도 있죠. 눈치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가봐요. 그냥 동생 대하듯, 아들 대하듯 그러는 줄 알았는데.”
“.......”
“뭐 동생이나 아들...이 되어본 적이 딱히 없지만. 그렇다고 불쌍하다고 광고하는 건 절대 아니고요. 저는 그래도 아버지도 계시고 사지도 멀쩡하고 대학도 다니니까 어떻게 보면 다 배부른 소리죠. 제가 조건이 나쁘진 않잖아요. 살만하니까... 이런 불평도 하는 거고.”
“아니....”
“원래 이런 이야기 잘 안 하는데 괜히....”
류선재는 섣부른 위로를 건내지도 못하고 가슴이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에 가까운 슬픔을 느꼈다. 김강휘는 담배를 피우자 오히려 취기가 확 올라왔는지 주르륵 벽을 타고 바닥에 쪼그려앉았다. 류선재는 김강휘의 한 뼘 앞에 마주 앉아서 풀린 눈의 김강휘를 마주했다.
류선재는 김강휘의 빨개진 뺨과 코, 그리고 귓가를 잠시간 바라보다 겉옷을 벗어서 김강휘의 어깨에 둘러줬다. 괜찮다는 듯 손을 몇 번 내저었지만 취객의 거절을 딱히 효과가 있지도 않았다.
김강휘는 옷을 몇 번 매만지더니 초점이 잘 안 맞는 눈으로 류선재를 응시했다. 미간을 찌푸려 류선재의 동공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하더니 이내 다시 풀린 눈으로 류선재를 빤히 바라보았다.
김강휘의 휑하게 드러난 목덜미가 유난히 추워보여 옷깃을 여며주려고 코트깃에 손을 댔을 때, 김강휘는 놀라울 정도로 제정신인 사람처럼 몸을 살짝 일으켜 류선재의 어깨를 잡고 벽에다가 밀쳤다. 순간적이었고 애초에 류선재도 살짝 알딸딸하던 상황이라 제대로된 저항도 못 해보고 류선재가 벽으로 밀쳐졌다.
등 뒤의 딱딱한 벽이 차갑다라는 생각을 할 때쯤 류선재의 입술에 김강휘의 입술이 맞닿았다.
* * * * *
“지금 무슨....”
김강휘는 살짝 헐떡거리며 류선재의 입술을 비집고 혀를 집어넣었다. 술에 취해서인지 키스가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류선재는 잠자코 김강휘가 제 입안을 헤집는 걸 방관하다가 김강휘가 잠시 호흡을 재정비하려고 입술을 떼자마자 다시 입술을 겹쳤다.
류선재는 벽에 등을 대고 몸을 일으키고는 김강휘의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고 혀를 섞어댔다. 김강휘는 입천장을 훑을 때마다 몸을 떨어댔는데 초반에는 추위때문인지 흥분때문인지 분간이 안 되었으나 이쯤되니까 확실히 후자인 것 같았다.
채 타액을 다 갈무리 하지 못해서 김강휘의 입가를 타고 침이 흘렀다. 호흡이 모자라서인지 계속 뒤로 고개를 빼려고 하는 것을 류선재가 단단히 잡고 입안을 잔뜩 헤집었다. 김강휘가 결국 류선재의 팔뚝을 탭을 치듯 치고 나서야 류선재는 떨어졌다. 그러나 김강휘가 호흡을 재정비하기도 전에 다시 입을 맞춰왔다. 맞붙은 입술 사이로 김강휘의 억눌린 신음이 새어나왔다.
한참을 혀를 섞다가 김강휘가 고개를 옆으로 틀어 입술을 피하자 류선재는 곧바로 김강휘의 턱에 입술을 맞붙였다. 잘빠진 턱선을 따라 짧게 입을 맞추고는 그대로 목에 입술을 붙였다. 김강휘는 류선재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숨을 짧게 들이켰다.
류선재가 걸쳐준 겉옷이 바닥에 떨어졌고 김강휘가 놀라서 겉옷을 주우려고 몸을 떼자마자 류선재가 그대로 김강휘를 밀어붙여서 바닥에 눕혔다. 김강휘의 등 뒤로 겉옷이 느껴짐과 동시에 류선재가 그대로 입을 맞부딪혀왔다. 김강휘가 손을 애매하게 허공에서 허우적대자 그대로 손목을 잡아 제 목에 두르고는 윗옷 안을 파고들었다.
류선재가 김강휘의 허리께를 건드릴 때마다 김강휘의 몸이 튀어올랐다. 길바닥 한 가운데서 이런 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평소 류선재라면 생각도 안 해봤을 정도로 풍기문란과 공연음란죄 뭐 여튼 경찰의 제재 정도는 거뜬히 받을 짓이었지만 술때문인지 류선재의 그러한 도덕관념은 제법 흐려진 상태였다.
김강휘가 류선재의 손목을 한 손으로 붙잡았지만 강하게 당기지 않은 걸로 보아 그만두라는 소리는 아니었고 속도나 조금 늦추라는 거였다.
‘귀엽네....’
“흐으....”
숨이 몇 번 새고 둘의 키스가 꽤나 오래 지속이 되고 나서 류선재는 김강휘의 뺨과 목에 연신 입을 짧게 맞춰댔다.
“안으로 들어갈까?”
추운 날씨를 걱정하는 말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이 은근하게 들렸다. 게다가 아예 그런 쪽의 사심이 없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이긴 했다. 김강휘는 류선재의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는 몰라도 고개를 저었다. 류선재는 김강휘의 입술을 몇 번 더 쪽쪽대고는 흘러내린 제 겉옷을 주워서 김강휘의 어깨에 다시 둘러주었다.
“그럼... 어떡할까? 계속 밖에 있을래?”
김강휘는 여전히 침묵했다. 류선재는 괜스레 초조해져 김강휘의 차가워진 손을 만지작댔다. 잠시 뒤 김강휘는 여전히 흥분기가 남아있는 목소리로 류선재에게 물었다.
“마지막 질문인데요.”
“응?”
김강휘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이거 꿈이죠?”
04. 꿈의 주인
“뭐?”
류선재는 마치 찬물을 맞은 것같았다. 모든 행동을 중단하고 멍하게 김강휘의 얼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류선재는 말없이 굳은 얼굴로 김강휘를 바라봤다.
“...꿈에서 이걸 꿈이라고 하면 모두가 날 쳐다본다던 소리는 들었는데.”
김강휘의 말에 류선재는 혼란스러워졌다. 류선재는 스물셋의 김강휘를 알았지만 동시에 몰랐기도 했다. 그때의 김강휘는 류선재에게 좀처럼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없었고 류선재는 언제까지나 그의 속내를 짐작만 하곤했었다..
‘그런데 이게 꿈이라고?’
류선재는 꿈과 현실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법을 몰랐고, 현실은 때론 악몽이 되고 악몽은 때론 현실이 되기도 했다. 저와 김강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웠으나 김강휘 하나만큼은 무엇보다도 현실적이었다.
그제서야 류선재의 머리를 비집고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만약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이 꿈의 주인은 누구일까? 자신일까, 김강휘일까?
그리고 곧바로 류선재는 답을 찾았다.
“처음에는 꿈인 줄 몰랐어요. 당신 말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지만 명확하게 그 부분을 꼬집어내기도 어렵고 되게 모호하게 들렸는데.... 꿈인 걸 알고나니까 새삼스럽네요. 당신은 저를 알고 제가 당신을 모른다는 것부터 이상했는데.”
“아니....”
“제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적은 없거든요. 아마도.”
“.......”
“그리고 경찰관님을 기억 못할 것 같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이건 현실은 아니겠죠.”
류선재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술집 뒷편의 벽이 빠르게 류선재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방금까지 있었던 술집이 사라지고 거리가 재조립되기 시작했다. 건물은 납작하게 바닥으로 꺼졌고, 가로수는 가파른 담장으로 변했으며 이상하리만치 멈춰있던 담배연기가 하늘에서 눈으로 내렸다.
둘은 북원 3동에 서있었다.
“류선재 경찰관님.”
“...어?”
“제가 그렇게 상상력이 좋지는 않은데 이렇게 생생한 걸 보면 당신이 제 상상의 산물은 아니겠죠?”
김강휘의 물음에는 옅은 불안이 묻어있었다. 류선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팔랑거리며 떨어지다 이내 매섭게 휘몰아치며 빠르게 바닥에 쌓였다. 류선재는 김강휘에게 걸어가려고 했으나 계속해서 다리가 눈 속으로 푹푹 빠지는 탓에 도저히 걸어갈 수가 없었다.
어느새 눈은 류선재의 가슴까지 차올랐다. 류선재는 눈에게 벗어나기 위해서 허둥거렸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눈은 더욱 빠른 속도로 쌓였다. 그때, 김강휘가 류선재에게 걸어왔다. 눈을 헤치고 류선재에게 손을 뻗었다. 김강휘가 눈에 닿자 눈이 빠르게 녹았다.
눈을 제 몸으로 완전히 녹인 김강휘가 축축해진 몸을 류선재에게 붙여왔다.
김강휘가 류선재의 뺨을 부드럽게 잡고 입을 맞췄다. 김강휘가 입술을 맞대자 류선재는 눈을 감았다.
눈은 빠르게 녹아 이제는 비로 변했다.
그러나 비는 둘을 잠기게 할 수 없었고 다만 류선재의 뺨을 타고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미안해요....”
류선재의 입에서 가느다란 사죄의 말이 나왔다. 목이 다 잠겨 목소리가 거칠었다. 김강휘는 대답대신 류선재의 입을 다시금 맞췄다. 김강휘의 입이 맞닿을 때마다 류선재의 입에서 사과의 말이 흘러나왔다.
선배.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선배. 미안해요.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제가 선배를 찾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선배는 조금 더 쉽게 살았을까요? 어느순간부터 선배가 제 몫까지 모든 불행을 짊어지고 산 것같아서 제가... 제가. 저는.... 제가 아니었다면.
“경찰관님이 아니면 안 돼요.”
류선재의 지리멸렬한 고해성사를 분명하게 깨는 단어였다.
“...그 모든 걸 겪고도?”
류선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전히 앳된 김강휘의 얼굴에 흉터가 생겨났다. 류선재가 모르는... 스물셋의 크리스마스를 지난 김강휘였다. 김강휘는 류선재의 눈썹 위로 길게 생긴 흉터를 매만졌다.
“선재야.”
류선재는 김강휘의 부름에 따라올 말이 뭔지 알고있었다.
“사랑해.”
한참을 가만히 서있다 류선재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저도 사랑해요.”
김강휘는 매번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살고자 했다.
삶의 의지가 없는 순간에도 사랑하나로 십년을 살아냈다.
모든 것이 어그러지고도 망가진 그 상황 속에서도 김강휘는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연인의 죄를 기꺼이 뒤집어 썼다.
그 모든 순간을 김강휘는 저로 살았다.
류선재는 김강휘가 사랑한다고 속삭일 적마다 지옥문 앞에 당도한 것 같은 기분과 동시에 저 위로 끌어올려지는 듯 구원받는 기분을 느꼈다.
살고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나 살만한 명백한 이유가 없다고 느낀 지점에도 김강휘는 저 기억 아래에서도 류선재를 살렸다.
김강휘는 류선재의 구원이었으나 이해자는 아니었고, 류선재 역시도 그랬다.
십년이 지나고나서야 류선재는 김강휘를 이해하고야 말았다.
가장 원하지 않은 방식에 다다르고 나서야 류선재는 그 김강휘가 빠진 수렁에 겨우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김강휘는 류선재를 살렸고 김강휘는 류선재로 살았다.
류선재는 자신의 악몽과 기억하지못하는 저편의 꿈의 주인이 누군지 그제서야 깨달았다.
십년이 지나 류선재는 비로소 꿈의 주인을 마주했다.
“우리가 언제 만나요?”
김강휘의 물음에 류선재는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것보다 먼저 도달한 부름을 들었다.
‘선재야.’
기다리라고 해야할지 기다리겠다고 해야할지 헷갈리는 와중에 부름은 조금 더 선명해졌다.
“선재야.”
류선재는 눈을 떴다.
05. 끝과 시작
김강휘는 잠에서 깨어났다. 분명 제법 긴 꿈을 꾼 것도 같았는데 잠에서 깨자마자 꿈은 빠른 속도로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꿈에서 본 남자의 이름도, 직업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때 느꼈던 현실감은 여전히 생생했다.
‘뭐지?’
김강휘는 여전히 비몽사몽한 채로 남자의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키는 저와 비슷했던 것 같았는데 체격은 살짝 더 큰 것도 같았다. 눈이 날카로웠고 전반적으로 차갑게 생겼으나 잘생긴 얼굴이긴 했다. 목소리는 제법 낮았고 성격은 뻔뻔하기도 했고 솔직하기도 했다.
‘누구지?’
머릿속으로 명확하게 남자의 정보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방금 떠올린 기억조차도 이윽고 사라졌다. 김강휘는 핸드폰을 꺼내서 날짜를 확인했다. 개강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 * * * *
“경영 A반 1학년 과대 류선재입니다. 혹시 오늘 개총 연락 못 받으셨어요?”
김강휘는 제 앞에 서있는 류선재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기시감을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아, 받았어요. 받았는데, 바빠서.”
“개강 총회는 몰라도 개강 파티는, 다른 선배들도 선배님을 필참하시라고....”
김강휘는 항상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이었으나, 그의 존재로 인해 현실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뭐랄까....
제법 꿈에 가까웠다.